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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인의 시, 그리고
황규관의 「길」 감상 / 박준 길/ 황규관 가자고 간 건 아니었지만 간 자리마다 허무 가득한 심연이다 떠나자고 떠난 건 아니었지만 두고 온 자리마다 가시덤불 무성한 통곡이다 지금껏 품은 뜻은 내 것이 아니었고 꾸었던 꿈도 내 소유가 아니었는데 지나온 길 위에 남긴 흔적에 왜 가슴은 식을 줄 모르는가 멈추자 해도 가야 하고 머물자 해도 떠나야 하는데 왜 설렘이고 번민인가 바람이고 생명인가 —시집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2011 .......................................................................................................................... 조금씩 이상한 느낌이 엄습했습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
줄장미가 피어나는 생각 (외 2편) / 동시영 여자가 “밥보다 마음을 더 잘 먹어야 한다”고 말하자 남자가 “마음보다 밥을 더 잘 먹어야 한다” 말한다 모르는 ‘나’를 따라가다 키 큰, ‘습관’ 따라 시장엘 간다 제철 없는, 물건들 사고파는 시장 속 팔리지 않는 신新풍속이 제철처럼 싱싱하다 ‘껍질’이 몸에 어울리는 옷을 오래 골라 사자 ‘알맹이’도 맘에 어울리는 옷을 한 벌 산다 밤이 어둔 방에 불 켤 스위치를 사자 낮이 어둔 맘에 불 켤 스위치를 산다 카페가 내게 다가오자 ‘슬픔’과 ‘기쁨’이, 누굴 만날 거냐? 앞다퉈 묻는다 ‘빈 칸의 카니발’을 혼자 팔고 혼자 사고 가끔은 나쁜 생각에 팔려나간다 ‘버르장머리미장원’ 앞 버릇없이 막자란 줄장미가 사람들 생각을 찌르다 놓다, 장난치고 있다 수평선은 물에..
시 / 박정대 촛불을 켜고 바람의 모습을 본다 쌀랑쌀랑 바람이 불었다 세상을 끄고 조용히 누워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발의 숫자를 헤아렸다 간혹 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었다 잠의 안팎에서 바람은 촛불의 허리를 흔들었다 멀리 있는 것들은 멀리 있어서 다행스럽게 빛났다 가까이 있는 생활은 추웠으나 촛불 한 자루로 이 겨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감자 몇 알과 담배가 여전히 남아 있으니 밤새 싸락눈은 내려와 어둠을 덮어 가느니 아침이 오면 이팝나무 위로도 눈꽃 가득 피어나겠다 쌀랑쌀랑 바람이 분다 아직 잠들지 않은 새벽의 이마 위로도 눈은 내린다 —웹진 《공정한시인들의사회》 2024년 4월호 ---------------------- 박정대 / 1965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
꿈속에서 우는 사람 (외 2편) 장석주 어딘지 모를 곳에서 겨울엔 눈 많은 파주로 넘어와서 꿈속의 꿈에서 홀로 울다가 눈사람 몇 개를 만들다 떠나겠지. 지난여름 장마에 맹꽁이가 울 때 시장통에서 사 온 편육을 먹고 고요한 음악에 귀를 쫑긋 세우면 고양이들은 구석에 몸을 숨기고 비탄과 유머도 모르는 채 졸고 있겠지. 피로가 몰려오는 저녁 사랑은 우리의 쓸쓸한 관습, 우리는 등을 켠 거실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눈 키스를 하다가 잠이 들겠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나, 우리는 파주에 산 적이 없는 이들에게 추억을 리본처럼 매달아주는 저녁들, 식탁에는 귀신들도 와서 밥을 먹겠지. 한밤중 늑골 아래서 누군가 말을 거는데 그건 귀신의 말, 알 수 없는 외계인의 말, 겨울마다 눈이 참 많이도 내렸지. 파주에서 인사..
매일밤 우리가 해왔던 노동 김소연 우리는 눈사람처럼 녹아내리는 연습을 했습니다 녹지 않을 가능성을 희망한 적도 있었으나 그런 희망은 아주 잠시 스쳐갈 뿐 녹을 때를 기다리며 연습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환한 정류장에 세워둡니다 8차선 도로 한가운데에 세워두어도 상관없지만 세워두든 눕혀놓든 큰 차이는 없지만 우리는 죽은 해파리처럼 해변에서 나뒹구는 훈련을 했습니다 투명해서 미끌거려서 부서져서 이게 뭐야? 신발 코나 작대기로 누군가 툭툭 치다가 이내 돌아서도 기억에 남을 리가 없는 것 죽은 참새처럼 누군가 손바닥에 담아가 자그마한 무덤을 만들어 줄 리도 없는 것 우리는 심해를 누비느라 좀 쉬고 싶다는 듯이 휴식과도 같은 훈련을 해보았습니다 겨울을 견디는 나무들도 흉내내보았나요? 여름을 즐기는 때와는 다른 ..
양말 (외 1편) 서진배 거 봐라 네가 가진 자루가 작더라도 왼쪽 오른쪽 나누어 담으면 너를 다 담을 수 있잖니, 너를 붙잡을 곳 마땅치 않아 들고 걸어가기 어려울 때는 너를 자루에 담아 들고 걸어가면 한결 편할 거야 방으로 드는 식당에서 너를 구멍 난 자루에 담아 왔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너는 그 구멍으로 줄줄 새는 너를 들키고 싶지 않아 발을 숨겨야 할 거야 자루를 아무리 당겨 올려도 자루는 내 무릎도 담지 못할 뿐인데요 네 발만 담아도 너를 자루에 담는 거란다 황금색 계급장을 찬 어깨 앞에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는 것만으로도 떨고 있는 너를 감출 수 있거든, 쓰레기봉투에 너를 조금이라도 더 담으려 발을 넣고 밟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야 유리 거울처럼 깨진 너의 얼굴 조각들이 그 안에 담겨 ..
사라진 사람들은 부엌에 모여 산다 권현형 고요가 유리그릇에 담겨 정교하게 부서진다 사라진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곳은 부엌, 명절 가까운 10월엔 사람보다 구름이 살아 있다 빈집 부엌에서 이십 년 전에 들었던 탄식과 웃음소리를 뭉게구름의 중얼거림처럼 듣는다 향연이 끝나고 외할머니와 이모와 외삼촌이 차례대로 사라졌다 사라진 사람들은 부엌에 모여 사나? 오래된 냄비와 사발을 씻을 때마다 고요가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곤 한다 낡은 싱크대에 붙어 있는 라디오를 통해 엘피판으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운 좋게 만나기도 하나 모계의 혈관을 타고 사람 소리가 먼 곳에서 흘러온다 몸은 사라져도 소리가 남는다 홀로 있는 사람은 쇳덩어리 돌덩어리와도 교감한다 홀로 있던 외할머니는 거실 유리창으로 내다보며 수많은 자동차와 바퀴와 ..
햇빛을 보다 (외 1편) 문효치 지구 변두리 어느 소수 민족 그들 축제의 제물이 된 물소의 뿔 끝에 반짝 해가 와서 내려앉는다 저 햇빛의 황홀 뿔의 밑동으로 정액처럼 흘러내리는 햇빛 죽음의 뿔 위에서 신은 지금 교접 중이다 그동안 신은 외로웠나 보다 바람은 풀숲에 들어 잠자고 있는데 지금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줄 4 비틀거리다 넘어진다 줄에 걸린 것이다 세상에 널려 있는 줄 눈을 크게 뜨고 건너뛰어야 ᄒᆞᆫ다 줄은 촘촘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바람 같은 건 거침없이 빠져나간다 그렇다 정신 바짝 차리고 바람이 되어야 한다 바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시집 『헤이, 막걸리』 2023.12 --------------------- 문효치 / 1943년 전북 군산 출생. 1966년 한국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