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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인의 시, 그리고
홍범도가 오셨다 이동순 홍범도가 오셨다 눈부신 아침햇살로 오셨다 무지와 맹종 걷어내라고 오셨다 홍범도가 오셨다 실안개 바람 향기로 오셨다 사람을 더욱 사랑하라고 오셨다 홍범도가 오셨다 돌주먹 무쇠주먹으로 오셨다 야만과 맹목 깨어 부수라고 오셨다 홍범도가 오셨다 활과 화살촉으로 오셨다 우둔과 무책임 단번에 쏘아 넘기라고 오셨다 홍범도가 오셨다 밀물과 썰물로 오셨다 자신을 서둘러 변혁하라고 오셨다 —계간 《문학청춘》 2024년 봄호 --------------------- 이동순 /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시집 『개밥풀』 외22권.
새 박성현 새가 날아와 곁에 앉았습니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침이면 떠났습니다 어젯밤에는 새의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부리를 열었는데 당신이 웅크려 있었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당신을 꺼냈습니다 차고 앙상한 팔과 다리가 쑥쑥 뽑혔습니다 당신이 없는 곳에 벼랑만 가팔랐습니다 당신의 팔과 다리를 들고 벼랑에 올랐습니다 몇 년이고 비와 눈과 바람을 짊어졌습니다 매일매일 새가 날아왔습니다 매일매일 웅크린 당신을 뽑아냈습니다 —계간 《상상인》 2024년 봄호 ------------------- 박성현 / 1970년 서울 출생. 2009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시 등단.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손택수의 「나뭇잎 피어날 때 피어나는 빛으로」 감상 / 나민애 나뭇잎 피어날 때 피어나는 빛으로 손택수(1970~)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몇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생을 함께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이라도 찾듯..
정현종의 「오 따뜻함이여」 감상 / 문태준 오 따뜻함이여 정현종(1939~ ) 군밤 한 봉지를 사서 가방에 넣어 버스를 타고 무릎 위에 놨는데,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갓 구운 군밤의 온기 ⸺ 순간 나는 마냥 행복해진다. 태양과 집과 화로와 정다움과 품과 그리고 나그네 길과…… 오, 모든 따뜻함이여 행복의 원천이여. ...................................................................................................................................................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큰눈이 오고 수은주가 영하로 뚝 떨어질 때 세상은 눈덩이와 얼음 속에 갇힌 듯해도 우리는 온기를 아주 잃지는..
이대흠의 「목련」 감상 / 나민애 목련 이대흠(1967~ )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
손택수의 「시집의 쓸모」 감상 / 박준 시집의 쓸모 손택수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느냐며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차마 말은 못하고 건성으로 수저질을 하다가 (책을 발로 밀어 슬쩍 빼면 지진이라도 난 듯 덜컥 식탁이 내려앉겠지 국그릇이 철렁 엎질러져서 행주를 들고 수선을 피우겠지) 고소한 복수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이사를 다니느라 다치고 긁히고 깨진 식탁 각을 잃고 둥그스름해진 모가 보인다 시집이 이토록 쓸모도 있구나 책꽂이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보단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서 국그릇 넘치지 않게 평형을 잡아주는, 오래전에 잊힌 시집 이제는 ..
강인한의 「갚아야 할 꿈」 감상 / 최형심 갚아야 할 꿈 강인한 자정의 비는 가로등이 하얗게 빛나는 곳으로 몰려간다. 멈칫멈칫 내린다. 거기 있을 것이다. 느릅나무 이파리 뒤에 숨어 우는 민달팽이 푸른 울음, 기다란 한 줄이. 내밀어 더듬는 뿔에 당신의 붉은 꿈이 걸린다. 엎치락뒤치락 갚아야 할 당신의 꿈이. ......................................................................................................................................................................................... 전쟁이나 경제위기가 닥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이들은 언제나 그 사..
김지녀의 「모딜리아니의 화첩」 감상 / 송재학 모딜리아니의 화첩 김지녀 목이 계속 자란다면 액자의 바깥을 볼 수 있겠지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에서 얼굴과 얼굴과 얼굴의 간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무너질 수 있겠지 붉은 흙더미처럼 나의 얼굴이 긴 목 위에서 빗물에 쓸려나가네 꼿꼿하게 앉아서 갸우뚱하게 ―시집 『양들의 사회학』 2014.4 ............................................................................................................................................................... 모딜리아니의 긴 목이 아름답다고 말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