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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인의 시, 그리고
홍해리 시인 ‘치매행’ 완결편 『이별은 연습도 아프다』 출간 [동양일보 김미나 기자]황혼 이혼, 졸혼이 유행하는 요즘의 현실에서 부부의 사랑과 신뢰의 의미에 대해 깊은 울림을 주고 있는 시집이 나왔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보살피며 330편의 치매 연작시를 발표하고 이미 3권의 시집을 낸 바 있는 홍해리(79·사진·서울 강북구) 시인이 ‘치매행’의 완결편 『이별은 연습도 아프다』를 펴냈다. 아내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담은 이번 시집에는 모두 91편의 시가 실렸다. 이로써 2015년 '치매행' 1시집 『치매행致梅行』을 발표한 이후 2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2017), 3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에 이어 이번 시집까지 모두 421편의 치매 연작시가 완성됐다. 시집들 모두 아내가 치매에 걸렸..
가을 한 점 洪 海 里 따끈따끈하고 바삭바삭한 햇볕이 나락에 코를 꿰어 있어도 투명하다 혼인 비행을 하고 있는 고추잠자리가 푸른 하늘을 업고 빙빙 돌고 있다 여름 내내 새끼들로 시끄럽던 새집들은 이미 헌집이 되어 텅텅 비었다 너른 들판이 열매들로 가슴이 탱탱하니 더 바랄 것 하나 없이 가득하다.
가을빛 /홍해리 새벽녘 빗소리에 잠이 깨이다 비온 다음 투욱 툭 튀어나오는 가을빛 맑은 살의 깊은 잠을 위하여 햇살은 부숴지고 있느니 이 따스함이여 솔잎 사이 부드러운 바람은 영글어 혼자서 생각으로 일어서고 있느니 반야여 별빛도 익어 뚜욱 뚝 떨어지는 가을밤 은빛 이마에 빛나는 수수밭 위의 기러기 울음 한 점 두 점 깊어가는 작별인사.
라일락꽃 빛소리 / 홍해리 아스팔트 위 기진한 아지랭이 벅찬 신열로 자주꽃 속을 넘나드는 금빛새 종종종 자릴 옮기며 피고 있다 꽃술마다 오르는 불길 모닥불에 묻히는 하늘 불을 지피는 여학생들의 발뒤꿈치 하얀 어질머리 가락 꽃사태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암내같은 한 다발씩의 어지러움 아픈 開花
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 / 홍해리 꽃나무 아래 서면 눈이 슬픈 사람아 이 봄날 마음 둔 것들 눈독들이다 눈멀면 꽃 지고 상처도 사라지는가 욕하지 마라, 산 것들 물오른다고 죽을 줄 모르고 달려오는 저 바람 마음도 주기 전 날아가 버리고 마니 네게 주는 눈길 쌓이면 무덤 되리라 꽃은 피어 온 세상 기가 넘쳐나지만 허기진 가난이면 또 어떻겠느냐 윤이월 달 아래 벙그는 저 빈 자궁들 제발 죄 받을 일이라도 있어야겠다 취하지 않는 파도가 하늘에 닿아 아무래도 혼자서는 못 마시겠네 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
한 편의 시를 찾아서 /홍해리 내가, 나를 떠나고 나를 떠나보냅니다 우주가 내 속으로 굴러 들어옵니다 내가 우주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나를 찾아봅니다 나를 그려 봅니다 요즘도 새벽이면 가벼운 날개도 없이 나는 비어 있는 우주의 허공을 납니다.
복사꽃 그늘에서 /홍해리 돌아서서 새실새실 웃기만 하던 계집애 여린 봄날을 후리러 언제 집을 뛰쳐나왔는지 바람도 그물에 와 걸리고 마는 대낮 연분홍 맨몸으로 팔락이고 있네. 신산한 적막강산 어지러운 꿈자리 노곤히 잠드는 꿈속에 길이 있다고 심란한 사내 달려가는 허공으로 언뜻 봄날은 지고 고 계집애 잠들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