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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인의 시, 그리고
나는 어떤 계절이었을까/ 유성애 비 갠 아침, 창 너머로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당에 막 피기 시작한 선홍빛 장미 뒤로 너른 공터에 빼곡한 개망초 군단 앞산의 초록은 더욱 깊어져 개망초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티끌 하나 없이 말간 하늘이 그 산을 살포시 껴안고 있다 한 폭의 완벽한 풍경을 위해 철따라 몸을 바꿔가며 서로를 받쳐 주는 삶이란 저런 것일까 절망의 나날을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된다는 건 착각이고 오만이었다 여름 한 철 피었다 지는 생 지금 이순간이 황금기라는 듯 사나운 바람 앞에서도 의기양양한 개망초가 부러워졌다 살면서 주인공을 탐한 적 없었다 그럴 듯한 조연이 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렇게 수많은 계절을 허비한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그리움은 진짜 그리움이 아니다 ..
박수현 시인 경북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운문호 붕어찜 』 『복사뼈를 만지다』, 『샌드 페인팅』 연합 기행시집 『티베트의 초승달』 『밍글라바 미얀마』 『나자르 본주』 등 출간. 2011년 서울문화재단 작가창작 활동 지원금 수혜.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 지원금 수혜. 현 시인협회 중앙위원. 〈온시溫詩〉 동인. 샌드 페인팅 / 박수현/ (주)천년의시작 ❚신간 소개 / 보도 자료 / 출판사 서평❚ 박수현 시인의 시집 『샌드 페인팅』이 시작시인선 0321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2003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시집 『운문호 붕어찜』 『복사뼈를 만지다』, 연합 기행시집 『티베트의 초승달』 『밍글라바..
오영숙 시인 경북 김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제12회 동서문학상 입상 2016년 《시문학 》등단 시집 『 꿈꾸고 싶어요 나는 아직도 』 시인회의 동인 내 안의 국어사전 / 오영숙 내 입이 맨 처음 펼친 단어는 젖이었다 젖의 풀이말을 달다고 느낄 때 혀가 생겨났다 혀가 단맛을 발음할 때 심장이 생겨났고 심장 박동이 펼친 단어는 눈빛이었다 눈빛의 풀이말을 첫 생각에 담을 때 손이 생겨났고 손이 펼친 맨 처음 단어는 체온이었다 어머니 체온을 이불처럼 덮고 단잠에 들었다 꿈은 미처 풀이말을 달지 못한 채 차곡차곡 내 몸속에 쌓여만 갔다 머릿속에 쓸개라는 단어가 새로 등재될 때 꿈도 함께 어두워졌고 사람의 첫 파생어인 사랑을 사람으로 잘못 읽고 세상 밖을 떠돌았다 나를 사람 되게 한 뿌리로부터..
우물, 11월 박수현 첨벙, 뒤꼍 우물에 두레박을 부린다 이끼 낀 돌팍에 부딪히는 두레박 소리가 이적 저지른 죄들이 늑골을 타고 수직 낙하한다 흑백의 기억이 물방울을 튕기며 동심원을 그리는 그곳 두레박 속엔 노루꼬리 햇살 한 줌과 삭아 잎맥뿐인 상수리 잎새 몇 장뿐 여름은 적도의 스콜처럼 성급했고 지퍼를 목까지 올린 가을은 잰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았다 당도하지 않은 크리스마스 캐럴은 낯선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겨울은 왜 더 멀리 돌아가서 맞고 싶은 것일까 나는 그저 성글어진 나무 우듬지에 가닿는 새소리를 듣거나 겨울이 데리고 올 이야기의 페이지나 무심하게 넘기며 물끄러미, 달의 뒷면을 비끼는 두레박을 바라보았다 현관 밖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가는 신문지 더미처럼 이제 우물은 가물어서 아무도 두레박..
이향숙 시인 프로필 - 강원도 강릉 출생 2015년 겨울 현대시문학상으로 등단 동인 창작 활동중이며 지금은 바다 가까운 동네에서 시와 자유하며 살고 있다 E-mail ; noble2017@hanmail.net 그림자 벽화 / 이향숙 담벼락 나무 그림자 사이로 삽이 꽂힌 풍경 돌처럼 굳어서 내가 네게로, 네가 내게로 도무지 올 수 없던 날들 보랏빛 매 발톱이 무서리로 고갤 꺾고 하염없이 흔들려 그대가 만들어준 꽃밭을 가린다 너무 웃자라 무심히 지나쳐도 작고 여린 꽃잎이 수줍게 눈 맞추는 것을 그대는 알지 못 한다 저녁이 더 천천히 온다 무늬의 온도 / 이향숙 희디 흰 꽃대를 밀어 올릴 때 몰랐다 그리운 전언처럼 날개를 매달 때 더욱 몰랐다 어차피 이생을 목련으로 다 필 수 없으니 여러 날 꿈에 닿지 못해 ..
마흔여섯 채의 슬픔 / 지정애 너는 매일 천 개의 밤을 건너고 나는 매일 천 개의 해를 찾아다니느라 발이 부었다 너 떠나고 난 뒤 첫서리 같은 난데없는 한기가 나를 덮쳐오는 동안 나는 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지난날들의 고혹과 병증을 어루만진다 텅 빈 얼굴 속의 바싹 마른 입술과 입술이 만나 생의 바닥을 적셨던 날들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복사꽃빛 한 마디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내 전부를 네게 들이밀면 네 뼛속 살 속에 맺혀 있을 이슬방울이 내 머리카락을 축이고 네 전부를 껴안으면 삭정이같이 삭은 어깨에서 제비꽃 피어난다 네가 천 개의 밤을 건너는 동안 나는 들길의 풋순 같이 쑥쑥 자랐다 네가 건네어 온 한 줌의 온기에 천 년 전의 소식 같은 마른 얼굴을 다시 보며, 네가 첫봄처럼 내게 오던 날을..
가포(歌浦)에서 보낸 며칠 한동안 가포에 있는 낡은 집에 가 있었다 늙은 내외만이 한 쌍의 말간 사기 그릇처럼 바람에 씻기며 살아가고 있는 바닷가 외딴집 바다 소리와 함께 그럭저럭 할 일 없이 보고 싶은 이 없이 참을 만했던 며칠 저녁이면 바람이 창문에 걸린 유리구슬 주렴 사이로 빨강 노랑 초록의 노을 몇 줌을 슬며시 뿌려주고 가기도 했다 손톱만한 내 작은 방에는 구름처럼 가벼운 추억 몇 편이 일렁이며 떠 있기도 했다 그 집에 머물던 며칠 동안 내 가슴속 아슴하게 오색 물무늬가 지던 그러한 며칠 동안 나는 사랑이라든가 사랑이 주는 괴로움이라든가 하는 마음의 허둥댐에 대하여 평온했고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그런 허둥댐의 덧없음에 대하여 다 돌아간 저녁의 해변처럼 심심해지면, 평상에 모로 누워 아슴아슴 귀를 ..
샌드 페인팅 / 박수현 밤 사막을 가로지르는 쌍봉낙타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바람은 능선의 기하학적인 장정裝幀을 지운다 바람과 모래의 입술이 맞닿은 텍스트는 다시 백지다 한기가 엄습하는 밤, 육탈한 뼈만 남는 단호한 시간 전갈좌가 밤새 사막의 지붕에 도사리고 있다 무주지無主地의 모래톱에서 별빛들이 붐빈다 아침 모래 능선이 노파의 턱밑 주름처럼 호弧를 그린다 밤새 곱은 손을 비비던 사막은 아침햇살에 사프란빛으로 쾌활하다 능선의 늑골을 향해 검은개미를 먹고사는 도깨비도마뱀이 기어가고 새들은 색종이 조각처럼 공중을 난다 어린 유칼리 나뭇잎들이 쟁쟁거리는 순간 모래 소용돌이를 온몸이 밀고 가는 캐러밴들 정오 모래들이 흰 하늘로 스타카토식 고음의 노래를 바친다 너무 많은 태양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극사실주의, 팽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