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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

이향숙 시인의 시

박숙인 2022. 12. 17. 17:18

이향숙 시인 프로필  -

 

강원도 강릉 출생

2015년 겨울 현대시문학상으로 등단

<A4 > 동인 창작 활동중이며

지금은 바다 가까운 동네에서

시와 자유하며 살고 있다

 

E-mail ; noble2017@hanmail.net

 

 

그림자 벽화 / 이향숙

 

 

담벼락 나무 그림자 사이로

삽이 꽂힌 풍경

돌처럼 굳어서

내가 네게로, 네가 내게로

도무지 올 수 없던 날들

보랏빛 매 발톱이

무서리로 고갤 꺾고  하염없이 흔들려

그대가 만들어준  꽃밭을 가린다

 

너무 웃자라 무심히 지나쳐도

작고 여린 꽃잎이 수줍게 눈 맞추는 것을

그대는 알지 못 한다

저녁이 더 천천히 온다

 

 

무늬의 온도 / 이향숙 

 

 

희디 흰 꽃대를  밀어 올릴 때 몰랐다

그리운 전언처럼 날개를 매달 때 더욱 몰랐다

어차피 이생을 목련으로 다 필 수 없으니

 

여러 날 꿈에 닿지 못해 안으로 깊어지다

짙어진 무늬들

몸져누운 후에야 본다

 

누워야 환희 보이는

 

붉어지는 눈빛으로 단번에 후드득 떨어지는 검은 잎

희미해져 가는 시절은 꿈 꾼 것이 아닌데

땅거미처럼 자꾸 뒤척이며 돌아눕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늘이 깊어질수록

 

왜 그토록 잠깐이었는지

다 알 듯하다

 

당신들의 시절

 

 

 

수련  / 이향숙

 

 

빛이 보이지 않는 탁한 물 속

깊은 돌들의 꿈이

흔들이며 잎으로 피어서 꽃대를 마침내 밀고 마는

그렇게 짧게 피고 지는 한 생

 

사라지지 않는 것 속엔 없는 아름다움

사라져야  비로소 보이는

흔들려야  보이는 그런 고요

 

꽃으로 적막을 껴안는 그런 고요

 

 

이별 방정식 / 이향숙

 

 

해가 가느라고 그러는 거야  스산하고 춥고

발목부터 시리잖아

가령 뭉근히  저려오는 것도  꼭 먼 곳부터 뒤꿈치

갈라지듯  골이 패이지

따끔거리고 디딜 때마다 아픈 건 꽤 오래 가야 해

기억할게,  건너편 붉은 건물 뒤 배경처럼 서 있는

키 큰 나무가 안개를 베고 누워있어

희미해 네가 나를 버려 주기를 기대할게

비틀거리던 신발을 가지런히 신겨주던 그 손으로

발목을 잘라 주었다면

붉은 피 엉겨 붙어 꽃이 몇 번이나 피었다 졌을 거야

발목 잘라도 밤마다 자라던 파래 같은 머리카락

꿈마다 잦아들어

묶다가 헝크러진 기억

 

 

 

새들의 전서 / 이향숙

 

 

검은 모래 위 발자국

수만 개가 엉겨 붙은 거룩한 꽃무늬

어지러운 문자를 따라 곰곰이 들여다보니

난독중이다

얼마나 서성거렸을 조형문자

너도 어찌할 바를 몰라 묵묵히 서서 고개를 파묻고

버텼던 시간

바람이 이는 방향으로 시린 결들이 금 긋고 간 자리

 

품고 싶어도 품을 수 없는 그런 바다가 있다

어두워져야 비로소 보이는

 

 

 

사막을 건너는 법 / 이향숙

 

 

늦가을 어둔 바람이 칼처럼 위태롭다

 

어슴푸레 서 있던 강둑이

툭 끊어지는 소리

달이 풀어져서 안으로 흘러온다

잦아드는 물길에 젖는다

어디서부터 였나 기억도 없이

예기치 않은 발자국이 네게 섞이어 들 때부터

 

길 위에서 길을 잃는다

 

두 눈을 잃은 낙타가 사막을 건너고 있다

 

 

시 받기 / 이향숙

 

 

뭘 길게 말 해

짧게 해

 

평생 받아 써 바야

한 줄이지

 

씨를 심으니 꽃이 폈다

 

그걸 놓고

왜들 그리 말이 많대?

 

그러게

 

 

구절초 사랑 / 이향숙

 

 

구구절절 낮은 산등성이가 흰 눈물방울처럼 그득하다

버리는 것보다 어려운 건 쓸모가 있을 테지 하는 것

버렸다는 것보다 무서운 건 잊혀 졌을 거야 하는 것

끝까지 망설이는 건 버린 게 아니라 잊을 수 없는 것

 

아무도 모르는 깊은 산꼭대기에서 바위틈까지

이제 곧 꽃 틔울 일만 남았다

아홉 번 꺾어졌는데 한 번은 더 못 꺾어지겠나

 

구절초 하늘 향해 한 송이씩 낮게 목을 젖힐 때

분홍이 희어질 때 까지 밀어 내지 못한

네 눈물이 그득하다

 

너무 가까운 마음 언저리를 밀어 내느라고

그토록 용케 버틴

 

 

 

안부 / 이향숙

 

 

누군가 당깁니다

낯선 피가 낯설지 않게 당겨옵니다

밀려가는 게 아니라 당겨 오는 거라고

모래언덕 핥고 간 자리마다 안부를 묻고

싶었다고 전합니다

귓불을 물고 뜯는 파도 소리가 천진합니다

 

젖은 손부채를 하고 뭉근함으로 애써 먼 데

눈을 맞춰봅니다.  자꾸만 짧아지는 손가락으로

수평을 그어 보는 데 등대 모양을 닮은 부표는

노랑노랑입니다

 

푸른 혈관을 꽂는 바다에 막 도착했습니다

온몸의 피를 솟구쳐 걸러내는 중입니다

 

온통 푸릅니다

 

오늘만큼 파도는

알맞은 생 하나를 골라내느라

수없이 흔들리고 일렁입니다

 

지금

당신이 그리운 시간입니다.

 

 

 

목단애가 / 이향숙

 

 

네가 떠났다

붉고 탐스런 입술이 뭉툭하여

야윈 눈 맞춤하던 네가 스러졌다

맻혔다 벌어지며 툭툭 지는 꽃

흔적도 없이 애달프다

꽃 진자리에 왕관을 얹고 속으로만 단단해지는 꽃

부질없는 밖을 떨어내자

꽃잎 밀어내려 버팅기고 매달리던 굳은

심지 같은 시간

견뎌내자고 넘어서 보자고 입술을 깨물 때마다

엉겨 붙던 핏빛 십자가

견고한 안개 속에 검붉음의 시게가 멈춰버린

 

너무 이른 봄날

그토록 열망했던 꽃 진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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