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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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

최갑수 시인의 시

박숙인 2022. 11. 28. 18:16

가포(歌浦)에서 보낸 며칠                           

 

한동안

가포에 있는 낡은 집에 가 있었다

늙은 내외만이 한 쌍의 말간 사기 그릇처럼

바람에 씻기며 살아가고 있는

바닷가 외딴집

바다 소리와 함께 그럭저럭

할 일 없이

보고 싶은 이 없이 참을 만했던 며칠

저녁이면 바람이

창문에 걸린 유리구슬 주렴 사이로

빨강 노랑 초록의 노을 몇 줌을

슬며시 뿌려주고 가기도 했다

손톱만한 내 작은 방에는 구름처럼 가벼운

추억 몇 편이 일렁이며 떠 있기도 했다

그 집에 머물던 며칠 동안

내 가슴속 아슴하게 오색 물무늬가 지던

그러한 며칠 동안

나는 사랑이라든가

사랑이 주는 괴로움이라든가 하는

마음의 허둥댐에 대하여 평온했고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그런 허둥댐의 덧없음에 대하여

다 돌아간 저녁의 해변처럼 심심해지면,

평상에 모로 누워 아슴아슴 귀를 팠다

오랫동안 곰곰이 내 지나온 세월과

살아갈 세월을 생각했다

가끔, 아주 가끔

아픈 듯이 별들이 반짝였고 그때마다

감나무 잎사귀들은 바다와 함께 적막했다

 

 

 

 

나무를 생각함                                         

― 손택수 형에게

 

나무는 제가 가야할 길을

알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둥글게 첫 나이테를 말기 시작할 때부터

나무는 언제나

다가올 제 운명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나무는 제몸에 명주실을 걸어

소리가 되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어깨를 기대

집이 되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제 살을 깎아

부처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나무는

한평생 나무로만 살다가

어느 짧은 순간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나무는 알고 있었다

그 무엇이 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잎사귀에 고이는

나지막한 봄비의 가르침만으로도

나무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사랑                                        

 

한 번이면 된다

오직

단 한 번

 

유서를 쓰듯

우레가 치듯

 

나에게 오라

부디, 사랑이여

와서 나를 짓밟아라

 

 

 

 

밀물여인숙 1                                          

 

더 춥다

1월과 2월은

언제나 저녁부터 시작되고

그 언저리

불도 들지 않는 방

외진 몸과 외진 몸 사이

하루에도 몇 번씩

높은 물이랑이 친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집 나선 지 이태째라는 참머리 계집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부서진 손톱으로

달을 새긴다

장판 깊이 박히는 수많은 달

외항을 헤매이는 고동 소리가

아련하게 문턱까지 밀리고

자거라,

깨지 말고 꼭꼭 자거라

불 끄고 설움도 끄고

집도 절도 없는 마음 하나 더

단정히 머리 빗으며

창 밖 어둠을

이마까지 당겨 덮는다

 

 

 

 

밀물여인숙 2                                           

 

바다가 밤을 밀며

성큼 뭍으로 손을 내밀고

아낙들이 서둘러

아이들을 부른다 겨울밤은

폐선의 흔들림을 감당하기에도

벅차고 내 잠을 밀고

촘촘히 올라오는 잡어떼

별처럼 삼십 촉 백열구가 떴다

아직도 잠들지 못한 걸까,

홑이불 속

사고 싶은 것이 많다는 그 여자도

따라 뒤척인다 뒤척인 자리마다

모래알들이 힘없이 구르고

곧 허물어질 것만 같은 등

나는 입술을 대고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러본다

그 여자의 등이 조금씩 지워진다

어느 땐가 내가 서 있었던 해변과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해보던

사납던 그 밤도 지워진다

여자의 등에 소슬하게 바람이 일고

만져줄까, 하얗게 거품을 무는

그녀의 얇은 허리와 하루 종일

창문을 벗어나지 못하는 섬

집이 없는 사내들이

모서리 한 켠씩을 차지해

저마다 낮은 어깨를 누인다

지붕 위에는 밤안개가

오래오래 머문다

 

 

 

 

밀물여인숙 3                                          

 

창 밖을 보다 말고

여자는 가슴을 헤친다

섬처럼 튀어오른 상처들

젖꽃판 위로

쓰윽 빈 배가 지나고

그 여자,

한웅큼 알약을 털어넣는다

만져봐요 나를 버텨주고 있는 것들,

몽롱하게 여자는 말한다

네 몸을 빌려

한 계절 꽃 피다 갈 수 있을까

몸 가득 물을 길어올릴 수 있을까,

와르르 세간을 적시는

궂은 비가 내리고

때묻은 커튼 뒤

백일홍은 몸을 추스린다
  
그 여자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애처로운 등을 한 채

우리가 이곳에 왜 오는지를

비가 비를 몰고 다니는 자정 근처

섬 사이 섬 사이

두엇 갈매기는 날고

밀물여인숙

조용히 밀물이 들 때마다

 

 

 

 

밀물여인숙 4                                           

 

목련이 진다 

봄밤, 지는 목련을 바라보다

그 여자도 따라 진다

사랑에 헤프고

눈물에 헤프고

가르랑 가르랑

실없는 웃음에도 헤픈 그 여자

문패도 번지수도 없이 언제나 젓가락 장단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그 여자

목련 때문이야,

꽃 진 자리가 안타까워

짓무른 속눈썹을 떼어내는

손톱만한 그 여자
  
사랑이나 하자꾸나

맨몸으로 하면 되는 거

하고 나서 씁쓸하게 웃어버리면 되는

그런 거

어느새 달은 떠올라 고요히 창문을 엿보고

봄밤, 목련이 진다

두근두근

목련이 진다

 

 

 

 

버드나무 선창                                         

 

창문을 열면

바다만이 맹렬했다 오직

바다만이 간절했다

아랫도리를 벗은 채

아이들은 줄지어 선창을 달려가고

유리창마다 달라붙은 눅눅한 어항의 불빛들

휴일을 함께 지낸 사내들을 보내며

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둘러 화장을 고쳤다

막막한 봄밤

소리치면 툭, 하고 끊어질 것만 같은 수평선

숨죽여 뱃고동이 둘고

달뜬 숨소리를 내뱉으며 버드나무들은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서러운 몸을 씻었다

무엇일까,

우리를 밤새 깨어 있게 만드는

비린 냄새의 그것들은 무엇일까,

창문을 닫고 누우면

커다란 눈을 가진 심해어들이

환하게 불을 밝힌 채

나의 뜨거운 얼굴을 향해

꼬리치며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바다에 괴롭고

삶에 괴로운 

서글픈 눈매의 까까머리 청년이었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아주 짧았던 순간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된 적이 있다

 

봄날이었다, 나는

창 밖을 지나는 한 여자를 보게 되었는데

 

개나리 꽃망울들이

햇빛 속으로 막 터져나오려 할 때였던가

 

햇빛들이 개나리 꽃망울들을 들쑤셔

같이 놀자고, 차나 한잔 하자고

 

그 짧았던 순간 동안 나는 그만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여자를 사랑해왔던 것처럼

햇빛이 개나리 여린 꽃망울을 살짝 뒤집어

 

개나리의 노란 속살을 엿보려는 순간

그 여자를 그만 사랑하게 되어서

 

그후 몇 번의 계절이 바뀌고

몇 명의 여자들이 계절처럼 내 곁에 머물다 갔지만

 

아직까지 나는 그 여자를 못 잊어

개나리꽃이 피어나던 그 무렵을 나는 못 잊어

 

그 봄날 그 순간처럼

오랫동안 창 밖을 내다보곤 하는 것인데

 

개나리꽃이 피어도

그 여자는 지나가지 않는다

 

개나리꽃이 다 떨어져도

내 흐린 창가에는 봄이 올 줄 모른다

 

                                                  * 크지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

 

 

 

서른 즈음에                                            
-낙원극장 3 

 

오늘 낙원극장에는

비스듬히 어깨를 기댄 때묻은

대걸레가 나란히 둘

도화지만한 봄볕이 서너 장

오드리 햅번 그레이스 켈리 잉그리드 버그만 문희 윤정희

내 가슴속 봄빛처럼 짧게 머물렀던

여자들 차르르르……

커다란 머리를 기우뚱 기울인 채

늙은 선풍기는 다가올 여름에 대해

목하 고민중

테스의 나스타샤 킨스키 양은

문 앞을 서성이며

♪ 연분홍~ 치마가 ♬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세월은 가고

필름은 돌고

인생은 지나간다는 것

주인공은 가고

음악만 남는다는 것

입가에 남은 침 자국처럼

팔뚝에 눌린 머리카락 자국처럼

 

 

 

 

석남사 단풍                                            

 

단풍만 보다 왔습니다 

 

당신은 없고요, 나는 

석남사 뒤뜰 

바람에 쓸리는 단풍잎만 바라보다 

하아, 저것들이 꼭 내 마음만 같아야 

어찌할 줄 모르는 내 마음만 같아야 

저물 무렵까지 나는 

석남사 뒤뜰에 고인 늦가을처럼 

아무 말도 못 한 채 얼굴만 붉히다 

단풍만 사랑하다 

돌아왔을 따름입니다 
  
당신은 없고요

 

 

 

 

석양리(石陽里)                                                

 

비빌 데 없는

내 젊은 날의 구름들을 불러다

왁자지껄 모래밭에 앉히고

하늘 한켠에서

일박이일(一泊二日)로 민막하는 초저녁 달에게

근대화슈퍼 가는귀먹은 할머니한테 가서

진로소주 몇 병 받아오게 하고

깍두기도 한 종지 얻어오게 하고

그런 날 저녁

외롭고 가난한 나의 어느 날 저녁

남해 한 귀퉁이 섬마을에서

바람이 나를 데리러 왔다가는

해당화가 피었대,

엽서만 전해 주고 그냥 돌아간 후

마을회관 옥상에 놓인 풍향계는

격렬하게 어스름 쪽을 가르키고

어디까지 왔나,

밤하늘은 금세

온갖 외로움들로 글썽거리고

 

 

 

 

신포동                                                   

 

가을밤 눈이 감기지 않았다

집어등도 이따금 파도에 끊기고

적적한 골목을 내다니는 것이

내 유일한 고단함인 양

어깨를 기울이고 문 밖으로 나서면

느티나무들이 소리내어

손가락을 꺾고 있었다

게처럼 짝짝거리며 하현이 가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바람이

잔잔히 별을 애무할 때

여자들은 온몸으로 一生을 반짝이며

방파제 너머로

가느다란 웃음을 던졌다

가을은 이곳에도 깊이 들었구나,

아무도 잠들지 않는

자정의 거리

한 차례 소란스러운 비가 훑고 지난 뒤

커튼을 닫고 사내들은

조용히 숨을 들었다 놓았다

나는 왜 뜨겁게 달아오르지 못하는가,

노랗게 불을 흔들며

나를 희롱하는 창문과

되돌려지지 않는 걸음 사이로

수런거리며 안개가 모여들었다

밤에게 엿보이는 내 헐한 가슴에는

시시때때 알지 못할 이름을 외우는

목청이 큰 바다가 있었다

 

 

 

 

11월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 앉아

오래 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십일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속같은 십일월의 그 햇빛들이

머물렀던 자리 십일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詩 몇편을 슬렁슬렁 읽어 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 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詩句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한 십일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얼굴을 내민 단풍잎 한 장이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처럼 

낯설고 계면쩍기만 한데

 

 

 

 

오후만 있던 수요일                                  

 

수요일 오후 내내 바람이 불었다

네쪽으로 내어놓은 창문에는

세월처럼 빠르게

구름만이 흘러서 가고

이따금씩 행려병자의

먼 눈빛처럼

햇빛이 잠시 창틀에 머물렀다 나는

네가 떠난 후 늘 그러하였듯이

너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일과

더불어

나의 안부를 전하는 일을

긴 긴 낮잠으로 대신했다

구름은 무슨 정처없음으로 닿을 곳도 없이

흘러서 흘러서만 가는가 그리고 햇빛은

무슨 애처로움으로 오후를 서성대다

저녁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가

잠에서 깨면

창 밖은 어두운 겨울 들판

네가 떠나간 겨울 들판

차가운 적막과 적막 그 깊은 사이에는

내 외로움의

높은 미루나무 한 그루가

쑥 쑥 소리도 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정기구독 목록                                         

 

나의 정기구독 목록에는
늦은 밤 창가를 스치는 빗소리와

그 빗소리를 들으며 슬쩍슬쩍 읽어보는

윤동주 백석 박용래 같은 눈물을 닮은 이름

몇 자들 새벽녘 앞마당에 고여 있는

막 떠다놓은 찻물처럼 말갛기만 한 하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바람난 애인이

또박또박 적어준 빛이 바랜 하늘색 편지

읍내에서 단 하나뿐인 중앙극장의

야릇하게 생긴 배우들 그 배우들이

슬픈 얼굴로 보여주는 화끈한 '오늘 푸로'

환절기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나흘간의 감기 그때마다 먹는 빨갛고

노란 알약들, 일요일 담에 널어 말리는

초록색 담요와 그 담요를 말고 자는

둥그스름한 낮잠 그 낮잠 위로

헬리콥터가 한 대 가끔 부르르르

저공 비행을 하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내 낮잠도

부르르르 따라 흔들리기도 하고 낮잠에서 깨어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들어버린

제라늄 화분 저물 무렵 혼자서 끓여 먹는

삼양라면 다시 필까, 물을 줘보기도 하지만

소식이 없는 제라늄 화분 시들었구나,

식은 밤을 말다 말고 나는

이렇듯 내 가난한 정기구독 목록에는

가난하고도 외로운 이름 몇 개와

붉은 줄이 그어진

희망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연체된 고지서의 커다란 글자들

 

 

 

 

지붕 위의 별                                            

 

요즈음엔

지붕 위로 올라가는 날이 잦다

내가 누군가를 지나치게 그리워하고

또 그 그리움으로 인해

깨진 저 서녘 하늘처럼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아니다

아직도 누군가를 못 잊어

못 잊어한다는 말이 아니다

지붕 위의 빛나는 별이여

어느 날 그대라고 불리웠던

내 가슴속

단단히 못박힌 이여

당신을 사랑했었단 말은 더더욱 아니다

 

별이 진다

이 밤 누군가

이별의 맑은 꿈을 꾸고 있는가 보다

 

 

 

 

판티엔 후허하오터                                   

 

사막을 지나와서야

사막을 보네

사랑을 떠나와서야 비로서

사랑을 아네
 

내게는 언제나

사랑보다는 기다림이 먼저가 아니었던가

내 앞에 펼쳐진

저 사막

스스로의 속으로 끝없이 무너져내리는

거대하기만 한 기다림

혹은

목마름
 

그래, 이제는

이별이 아닌

이별 이후의 기다림에 대해 말하기로 하자

창 밖의 저 사막처럼

그래, 외로운 저 영혼처럼

 

 

 

해안                                                     

 

예인선은

둥근 빛을 흔들고

누군가 동백잎에 물들어

깊은 병을 가질 때

여관집 늦은 가을비는

창가에 온다

밀물 드는 소리에

취객은 마음을 빼앗기고

여자들은 등을 달고

바다처럼 조용히

부풀어오를 때

 

~~~~~~~~~~~~~~~~~

 

최갑수 시인
1973년 경남 김해 출생.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97년「문학동네」 하계문예공모에 「밀물여인숙 1」외 5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단 한번의 사랑] (2000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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