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당선, 신춘문예] (34)
박숙인의 시, 그리고
202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웰빙 / 한백양 힘들다는 걸 들켰을 때 고추를 찧는 방망이처럼 눈가의 벌건 자국을 휘두르는 편이다 너무 좋은 옷은 사지 말 것 부모의 당부가 이해될 무렵임에도 나는 부모가 되질 못하고 점집이 된 동네 카페에선 어깨를 굽히고 다니란 말을 듣는다 네 어깨에 누가 앉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미 앉은 사람을 박대할 수 없으니까 한동안 복숭아는 포기할 것 원래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누구에게 잘하진 못한다 나는 요즘 희망을 앓는다 내일은 국물 요리를 먹을 거고 배가 출렁일 때마다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을 거고 옷을 사러 갔다가 옷도 나도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잔뜩 칭찬을 듣는 것 가끔은 진짜로 진짜 칭찬을 듣고 싶다 횡단보도 앞 노인의 짐을..
202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면접 스터디 / 강지수 면접 스터디 / 강지수 허리를 반으로 접고 아 소리를 내면 그게 진짜 목소리라고 한다 진짜 목소리로 말하면 신뢰와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자 방에 있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허리를 숙인 채 아 아 아 소리를 낸다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진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이제 그 음역대로 말하는 겁니다 억지로 꾸며낸 목소리가 아닌 진짜 당신의 목소리로요 엉거주춤 허리를 편 사람들이 첫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대전에서 왔고…… 멋쩍은 미소를 짓고 몇 번 더듬기도 하면서 말을 하다가 불쑥 허리를 접고 다시 아 아 거리는 이도 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손짓한다 이리 와서 진짜 목소리를 찾아보세요 쭈뼛..
202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이실비 서울늑대 / 이실비 사랑을 믿는 개의 눈을 볼 때 내가 느끼는 건 공포야 이렇게 커다란 나를 어떻게 사랑할래? 침대를 집어 삼키는 몸으로 묻던 하얀 늑대 천사를 이겨 먹는 하얀 늑대 흰 늑대 백 늑대 북극늑대 시베리아 알래스카 캐나다 그린란드 매일 찾아가도 없잖아 서울에서 만나 서울에서 헤어진 하얀 늑대 이제 없잖아 우린 개가 아니니까 웃지 말자 대신에 달리자 아주 빠르게 두 덩이의 하얀 빛 우리는 우리만 아는 도로를 잔뜩 만들었다 한강 대교에서 대교까지 발 딛고 내려다보기도 했다 미워하기도 했다 도시를 강을 투명하지 않은 물속을 밤마다 내리는 눈 까만 담요에 쏟은 우유 천사를 부려먹던 하얀 늑대의 등 네 등이 보고 싶어 자고 있을 것 같아 숨 고르며 털..
[2024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상현달을 정독해 주세요 / 박동주(박현숙) 햅쌀을 대야에 가득 담아요 차고 푸른 물을 넘치도록 부으면 햅쌀은 물에서 부족한 잠을 채워요 쌀눈까지 하얗게 불었을 때 당신을 향한 마음이 몸을 풀어요 상현달처럼 떠오르는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속삭여 주세요 도톰한 떡살에 소를 넣어요 당신을 향한 비문은 골라내고 꽃물결 이는 구절만 버무려 소를 만들어요 당신 생각으로 먹먹해지는 마음이 색색의 반달로 차오르도록 한밤중이 되었을 때 서쪽 하늘을 골똘히 보아주세요 반죽을 작게 떼어 양 손바닥 사이에 넣고 가을볕이 등을 쓰다듬듯 잔잔히 궁글려요 이야기를 담은 소를 가운데 넣어 가을 한나절을 빚은 색색의 상현달들 떡살에 별자리가 뜨기도 해요 비껴간 당신을 향해 밤하늘 높이 상현달을..
[2024 영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극빈 / 김도은 그 많은 소란과 발걸음과 악다구니들을 겪고도 골목은 여전히 휑하다 그늘이 묻은 소매 끝에 삶은 돼지머리 냄새가 가득하다 이마를 풀어헤친 나무의 복선사이로 저기, 좁은 골목 끝으로 환한 끝이 보인다 그 끝으로 얼마나 많은 이쪽을 저쪽으로 끌어들였나 기울어진 지붕 끝으로 끌어 내린 저 어둑한 그늘들은 누구의 뒤끝들인가 더는 새것이 찾아오지 않는 양쪽을 둔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이쪽 또는 저쪽에 속지 않는다 한때 유일한 재산이었던 포물선들은 조금만 펴거나 휘어도 뚝 부러지고 말 것 같은데 군데군데 구멍 난 혁명가를 입은 노인은 질긴 옛날 노래를 잇몸으로 부른다 극빈은 출렁이는 극한의 자세 팔꿈치에 휘감은 불안은 바짝 마른 저수지보다 컷다..
2024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자물쇠 / 박찬희 안거가 일이라고 단단히 가부좌를 틀어 오가는 바람도 굳어 서있다 하필이면 낭설이기 십상이기도 하고 굳이 풀어 들여다 볼 상당한 이유가 없어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잡다한 호기심만 늘어 없는 설명서를 찾아 읽는다 맹약의 해피엔딩은 녹슬고 녹아 서로에게 귀속되는 것 애지중지 닫아 걸 별 이유는 없어도 그냥 습관인 까닭에 벽을 치고 들어앉아 음과 양을 저 혼자 맺고 풀면서 맞지도 않는 열쇠를 깎는 일 어쨌든 그것도 수고라면 수고지 결속과 해지누 엎어 치나 매치나 한가지여서 틀림없는 쌍방의 일 자물쇠는 열쇠든 서로에게 맞출 수밖에 옳으니 그르니 해도 꼭 들어맞는 짝은 있게 마련인데 내가 너를 열 수 있을까 시도 때도 없는 옥쇄 앞에서 밤낮 우물쭈물, 나..
2024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운주사 천불천탑 / 김준경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그 누구도 떠밀지 않았다 저마다 한손에 정을, 다른 손에 망치를 들고 찾아왔다 운주계곡 조용한 골짜기를 따라 돌을 쪼는 소리가 이어진다 하나의 고통을 담아 한번의 망치질, 하나의 괴로움을 담아 쌓은 한층 사바세계로부터 깎여나간 마음 부여잡고 눈앞의 돌을 깎아 나간다 참아낼 수 없는 아픔을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눈이 나오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귀가 나오고 벗어날 수 없는 원망을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입이 나온다 고해의 파도 속에서 멈추지 않고 들리는 돌 쪼는 소리 고통이 모여 돌을 가루로 만들고 괴로움이 쌓여 탑을 이룰 무렵, 돌속에서 웅크려 있던 부처님이 들꽃같이 환하게 피..
시운전 강지수 날 때부터 앞니를 두 개 달고 태어난 아이치고 천성이 소심하다 했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기억이 뭐예요? 종합병원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발가벗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요 그게 기억나요? 최초의 관심과 수치의 흔적이 앞니에 누렇게 기록되었지요 나와 함께 태어난 앞니들은 백일을 버티지 못하고 삭은 바람에 뽑혀야 했지만,어쩐지 그놈들의 신경은 잇몸 아래에 잠재해 있다가 언제고 튀어 올라 너 나를 뽑았지, 우리 때문에 너는 신문에도 났는데, 하고 윽박을 지를 것 같더란 말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대大자로 뻗었을 때 혹은 동명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천성이란 무엇인지, 왜 어떤 흔적은 흉터로서 역할하지 못하고 삭아져버리는지 당신, 당신은 한 번 죽은 적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