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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인의 시, 그리고
2023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버터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
신춘문예 당선 시인에 관한 자료 1960~2010 몇 해 전에 어느 시 전문 계간잡지에서 신춘문예의 당선작과 그 시인에 관한 자료를 특집으로 묶은 바 있습니다. 이 자료는 먼저 1981년에 발행한 ‘실천문학의 시집 7, 8’ 『戰後 新春文藝 당선시집』상, 하권에서 발췌하였으며, 아울러 그 이후 실천문학사에서 낸 80년대, 90년대 '신춘문예 당선시집' 두 권 에서 1995년까지의 당선작들에 관한 기록을 찾아 덧붙인 것입니다. 1996년~2010년 자료는 문학세계사에서 해마다 발간하는 '신춘문예 당선시집'에 의거했습니다. 1960년 동아일보 당선 戰標地域 / 박열아 가작 나팔 抒情 / 정진규, 가작 가을의 詩 / 박진환 서울신문 당선 夜路 / 박응석 조선일보 당선 孝宗大王陵望頭石 / 최 원 1961년 경향..
2022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백가경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 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허블 등대 박샘 날리는 모래들이 눈에 자꾸 끼어든다 빠지고 싶어했던 깊이가 있었다고 열리면 바로 닫히는 문을 열고 또 연다 떴다가 감았다가 점멸하는 등대처럼 별이 든 눈에서는 깜박이면 반짝여서 출처를 밝힐 필요가 모래에겐 없었다 들 만한 깊이라면 찾기가 쉽지 않아 운석을 지나왔고 사막을 건넜으나 빠지면 나오지 않아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껐다가 다시 켜진 반복은 언제 쉬나 왔다 간 잠이 또 온 불면의 행성에서 모래는 침몰을 향해 국경선을 넘는다 박샘 1959년 대구 출생 출판사 '시인촌' 운영
럭키슈퍼 고선경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을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생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에요 나는 껍집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가 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2022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2022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반려울음 이선락 슬픈 시를 쓰려고 배고프다, 썼는데 배으다라 써졌다 뒤에 커서를 놓고 백스페이스키를 누르자 정말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렸나? 배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고프다, 쓰자 배가 없어졌다. 등이 구부러지는, 굴절된 뼈 같은 오후 그래, 슬픔은 늘 고프지 어딘가가 고파지면 소리 내어 울자, 종이 위에 옮겼다 * 세면대 위에 틀니를 내려놓듯 덜컥, 울음 한마디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뿐인가 했더니 옆구리 어디쯤에 쭈그리고 있던 마음, 굴절되어 있네요 거품을 집어삼킵니다 씹어도 건더기라곤 없는 튀밥 혓바닥이 마르고, 버썩거립니다 그래요, 뭐든 버썩거릴 때가 있어요 잠깐 눈 돌리면 쏟아지기도 하고… 난 수년 전 아이 몇몇 쏟아버린 적도 있어요 그땐 내 몸도 깡..
2022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상자 놀이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