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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인의 시, 그리고
외갓집 윤연옥 낡은 일기장에는 작은 파편들이 널려있고 가을이 데려 온 바람 놀다간 자리서 햇볕 냄새가 난다 툇마루서 뒹굴던 고슬한 추억 손바닥으로 만지고 쓸어보면 햇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해 속절없이 내려놓는 한조각 그리움 찬바람 불어 시린 속 일상 허기 달래면 동강 난 필름 마주보고 웃는다 장독대 항아리 속 웅크리고 있던 홍시 외할머니 손에서 단내를 풍기고 까치밥 쪼던 까치 한낮 풍경이 되다 꼬물대며 하냥 기어가는 사랑의 자취들 우화의 날갯짓 소리에 불빛 찬란하게 몸 바꾼 뜨락 가뭇없이 떠나가는 파편 한 조각 집어 들고 무심의 공덕이라 해조음에 하늘만 본다
활어 황사라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싱싱해요 벌려지지 않는 조개는 살아 있는 거래요 나를 단단히 여미고 싶을 땐 시장에 가요 횟집 옆 원단가게 사장님은 둘둘 말아 놓은 천을 풀어 보여주시는데 아득한 바다가 출렁대는 줄 알았어요 바위에 붙어 있는 게 굴만 있겠어요 저기 좌판 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동안 곰피를 팔아 온 할머니 손등 위에 물결무늬가 깊게 새겨졌네요 흥정은 늘 미끄럽기 마련이지요 손 안의 물고기처럼 자칫하면 놓쳐버리고 말아요 하루하루 쳐지는 나의 감정도 얼음조각으로 덮어 놓으면 조금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위에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도 물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데요 골목의 해류를 따라가다 보면 지느러미를 펄떡이는 물고기들 나..
2023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산에서 신나리 비 오는 새벽 요강을 몇 번이나 비워낸 할머니는 내가 잠에서 깰까 아침이면 부엌에 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약을 많이 먹어 몸에서 쓴 내가 났다 나한테는 미묘한 매실 냄새가 비가 퍼붓는데도 두 냄새가 멈추지를 않았다 푸른 논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뚫린다던 엄마는 절대 할머니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시골에 살면 우울증에 걸린다나 나 어릴 때 친구 하나가 너희 엄마 불 꺼진 매장에 혼자 앉아있더라 전해 준 적이 있다 할머니는 방에 걸린 무수한 액자들과 함께 살고 있어 나는 양심이 없으므로 엄마에게 몇 마디를 했다 얼마나 불쌍한지 외로운지 결국은 심심한지 할머니가 엄마는 고집 있고 성질 나빠 아빠랑 살기 어려웠을 거래 우리는 웃다가 콧물을 흘렸다 다음날 어..
2023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김혜린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돌아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언젠가 ..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멜로 영화 이진우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2023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묘목원 권승섭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그를 만난다 어디를 가냐고 그가 묻는다 나무를 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우리 집 마당의 이팝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잘 자란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 없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 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로는 헤아릴 수 없어서 기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자고 그가 말한다 아마도 그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나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다시금 지나..
2023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이예진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
2023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_ 볼트 / 임후성 볼트 임후성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