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白岩 박용신 시인] (12)
박숙인의 시, 그리고
애별리고(愛別離苦) 꽃들이 지는 날, 나는 술을 마셨다. 꽃잎들은 언제나 면도날로 손목을 긋던 내 청춘의 고뇌처럼 술잔으로 떨어져 딸년의 초경같은 붉은 피를 뚝 뚝 흘렸다. 슬픔들이 술과 함께 목젖을 타고 가슴까지 닿았을 때 나는 보았다. 사형지로 유배되는 절창의 그리움들을_ 왜, 그리 술 맛이 쓰던지_ 나는 왜 빗물주렴 넘어 쓸쓸히 떠나가는 카인을 한 번쯤 가슴 내밀어 뜨겁게 안지 못했나_ 삭정이같은 차가운 손으로 의식적 사레만 쳤다. 듣는 이 없는 헛 말들을 허공에 주절 댔고 안주 대신 증오의 눈물을 삼켰다. 빗물 흐르는 유리창에 술 취한 육신이 무너지고 살 거죽으로 부스럼처럼 푸른 반점이 번져 오래된 해수병자처럼 잔 기침을 했다. 빈 술잔 안으로 검은 밤이 무덤처럼 깊어 갈 때 목로주점 바람벽에 낙..
플레그쉽(Flagship) /박용신 플레그쉽(Flagship) 우리말로 깃발을 꽂은 배(旗艦)이다. 바다 위 수많은 무리 가운데 돋보일 수 밖에 없으니 모두가 그 뒤를 따라야 하는 존재다. 원래는 마케팅 분야에서 '시장에 성공한 놈 몰아주기' 라는 뜻으로 쓰였지만, 요즘에는 '최상위 기종', '모범된 리더'라는 뜻으로 정착 되었다. 요즈음 세태(世態)를 돌아보며 새삼 플레그쉽(Flagship)의 단어가 부각되는 것은 "모범된 리더"의 부재에서 오는 일종의 절망감에서 기인되는 것은 아닌지. 2014.1.28 시대의 리더를 기다리며 풀잎편지 -백암 박용신
나무들의 겨울나기 /박용신 이 오래된 겨울 갓 발라낸 생선가시의 생경함처럼 나뭇가지들의 오들거림이 마음까지 오그라들어 더욱 쓸쓸해지는 날입니다. 이렇게 추운 날, 숲 속 나무들은 어떻게 겨울을 보낼까요? 혹여 얼어 죽지는 않았을까?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씹어 보았지요. 그래도 죽지는 않았나 봅니다. 엷은 연두색 가지 속에 살포시 숨어 있던 봄이 입안 가득 풋풋한 향기를 선사합니다. 그래! 죽지 않았어. 나무들은 가을이 깊어 가기 시작하면 잎자루와 가지 사이에 "떨켜"라는 층이 생겨 잎을 속절없이 떨구어 겨울날 준비를 한데요. 그리고, 겨울이 오기 시작하면 나무 표피 안에 얼음 세포가 형성되어 내성이 생기고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이 와도 이렇게 끄떡없이 겨울을 난다고 하네요. 그리고, 봄이 오기 시작하면 ..
당신이 있어/ 박용신 언젠가는 한 번 찾아가 당신을 만나리라 마음으로 다짐만하고 올 해도 꽃을 피우지 못한 그대 정원을 나는 선뜻 찾아 나서지를 못했습니다. 겨우내 부질없이 서성만 대고 또, 기회를 놓쳐 버리다 2013년 마지막 날, 오늘, 꼭 이 말을 해야 겠기에... "정말, 당신이 있어 한 해, 너무 행복 했었다"고. 그리고 "사랑합니다."라는 그 말. 2013.12.31. 풀잎편지 백암-박용신
인생 신호등/ 박용신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사람들이 멈추어 서고, 자동차도 멈추어 서고 기차도 멈추어 서고 시간도 멈추어 섰습니다. 파란불이 켜지기까지 무거운 시간들이 얼마나 지나야 하는지, 희망이 지쳐 버린 미로의 장막 안에서 "기다림"은 막다른 "침묵"을 강요하고 지쳐 가는 또 다른 나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두 줄 철로의 가운데에 서서 그냥 잠이 들어 봅니다. 당신의 인생 신호등은 어떤 빛깔로 어디쯤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2013.12.29 풀잎편지 백암-박용신 (Photo Healing Essay)
아름다운 그림/ 박용신 어릴 때는 꼴망태 짊어지고 개울가에서 풀잎에 그림을 그렸고, 청년에는 시험지에 그림을 그렸고, 가장에는 돈에 그림을 그렸다. 내 인생에 그린 그림들이 미망(迷妄)이 되어 육신(肉身)의 만장(輓章)이 서는 날, 나는 어느 깃발 뒤에 자리하여 고개를 넘을까? 아름다운 그림 한 점, 군산 어느 담벼락 벽화에서 내 유년이 지나간다. 2014.1.18 풀잎편지- 백암 박용신 (Photo Healing Essay)
산사(山寺)에서 가을 보내기 # 여름내 버릴 수 없었던 것들을 이 가을, 나무가 낙엽을 보내듯 모두 떠나 보낼 일이다. 그리고 아다다처럼 살 일이다. 비워낸 가슴으로 찬바람이 불어도 견딜 일이다. 견디면 다시 봄이 오니까.(옥천사 경내에서) 산사(山寺)로 가는 길, 바람이 분다. 나무들이 늦가을 갈바람에 버티고 버티던 잎들을 속절없이 떨구어 내고 있다. 누가 오랠 일도 없고 가랠 일도 없는 산사로 가는 길, 여름내 버릴 수 없는 것들이 가슴 속에 남아 있어 힘겨운 날을 보내 왔다면 훌쩍, 거기에 가볼 일이다. 산길 위에서 버려 내지 못한 세상 응어리 들을 목청 돋우어 토해 내, 마음을 비워 볼 일이다. 때를 알아 스스로 비워 내줄 아는 나무들의 지혜를 배워 다가오는 겨울엔 백치처럼 아무 생각없이 화덕에 ..
오래된 그리움/ 박용신 두 눈을 감아 어제를 잊고, 두 발을 묶어 내일을 지우면, 세월은 추억을 버리고도 그리움이 될까? 찰나가 시작된 그 이전 진여(眞如)의 시간부터 방금이 멈춰 선, 빙점에 바로 이 시각까지, 미워져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절대(絶對)한 보고픔들을 한 번쯤 표백시켜 하얗게 하얗게, 거기, 여백에 아주 오래된 그리움 그리고 싶다. 하여, 옥양목 보다 더 순백해져 슬퍼지면 뚝, 뚝, 눈물 몇 됫박, 서럽게 서럽게 울어도 새벽 닭이 울 때까지, 묻혀서 감춰질 수 있는 가슴속으로 저며드는 기~인 흐느낌. 그대 향한 그리움. 2013.12.18. 풀잎편지-백암 박용신 (Healing Photo Ess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