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당선, 신춘문예] (34)
박숙인의 시, 그리고
2024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take /김유수 take / 김유수 쓰레기를 줍는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를 쓰레기라 불렀다 쓰레기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추운 거리를 그것이 배회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 속은 차갑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술은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그것의 코트가 차갑다 쓰레기와의 동일시는 어떻게 줍는 것일까 너는 왜 나처럼 쓰레기를 줍지 않을까 어떤 부부가 예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직장인이 따분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시인이 터무니없는 쓰레기를 주워 간다 그러한 쓰레기의 용도는 내가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지나가는 그것이 코를 틀어막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눈을 질끈 감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옷을 건네주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을 코트로 덮어버..
2024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왼편 / 한백양 왼편 / 한백양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
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_ 벽 / 추성은 벽 / 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
여기 있다 / 맹재범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커다란 고층빌딩 유리창..
2023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_ 어느 순례자로부터 온 편지(안태운론) / 송현지 어느 순례자로부터 온 편지 —안태운론 송 현 지 1. 앙투안의 판타지 2003년, 425파운드의 호랑이가 뉴욕 할렘의 어느 아파트에서 발견되었다. 이 호랑이와 함께 살던 이는 앙투안 예이츠라는 이름의 남성으로 그는 태어난 지 8주 된 시베리아 벵골호랑이를 자신의 아파트에 데려와 ‘밍’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와 같이 생활했다. 앙투안과 밍의 비밀스러운 동거는 그들이 함께 산 지 3년이 되던 해, 밍이 앙투안을 물면서 발각되었다. 미디어는 앞다투어 아파트 내부를 자유로이 오가는 밍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러는 사이 앙투안의 침실을 어슬렁거리며 침대 매트리스 위를 가로지를 뿐이던 밍은 어느새 도시와 자연의 경계를, 인간과..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장기 복역수 한이로씨 인터뷰] 창살 안 마지막 몸부림 "남은 삶, 詩 쓰며 속죄" 뱍승운, 임성수 | 입력 2023-01-05 0651 | "세상과 연 잇고 싶은 꿈... 유폐된 시간 속 창작 통해 성취" 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자( 한이로 )필명씨가 영남일보에 보내 온 편지. "내 시(詩)는 독백에 가깝다." 유폐되어 고독했을 그곳에서 그는 '혼자 묻고 답하는 시'를 썼다. 독백과 상념의 글쓰기. 그는 그것이 '독백'에 가깝다고 했지만, 그의 시는 스스로를 독려하는 '그만의 고해성사'처럼 보였다. 애절하게 호소하는 쓸쓸하고 낮은 독백, 여전히 세상과의 연을 이어가고 싶은 그의 꿈은 그렇게 한 줄의 시가 되어 창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읽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며, 그는 마침내 ..
2023 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작 데칼코마니 한이로(필명) 내 방엔 거울이 하나 나는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서로 다른 옷을 입을 때 살짝 삐져나오는 다디단 표정 나란히 서면 자꾸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거야 우리에겐 곁눈질이 있으니까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학교를 벗어던진 우리는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 위로 쏟아진 자동차들 사이로 뿔뿔이 흩어진다 반으로 나눠진 마카롱, 사라진 쪽이 너라고 생각하겠지 바닥에 번진 우리의 그림자를 지우느라 붉어지는 늦은 오후의 얼굴들 간호사가 건네는 푸른 옷을 얼굴처럼 똑같이 입고 우리는 사이좋게 캐스터네츠를 악기라고 말하고 난 뒤의 기분을 반으로 접는다 다른그림찾기와 같은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내 방엔 거울이 하나인데 두 개 ..
2023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드라이아이스 —결혼기념일 민소연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