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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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신춘문예]

2024년 영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극빈 / 김도은

박숙인 2024. 1. 1. 15:27

[2024 영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극빈 / 김도은

 

그 많은 소란과

발걸음과 악다구니들을 겪고도

골목은 여전히 휑하다

 

그늘이 묻은 소매 끝에

삶은 돼지머리 냄새가 가득하다

이마를 풀어헤친 나무의 복선사이로

저기, 좁은 골목 끝으로

환한 끝이 보인다

그 끝으로 얼마나 많은 이쪽을

저쪽으로 끌어들였나

기울어진 지붕 끝으로 끌어 내린

저 어둑한 그늘들은 누구의 뒤끝들인가

더는 새것이 찾아오지 않는

양쪽을 둔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이쪽 또는 저쪽에 속지 않는다

한때 유일한 재산이었던 포물선들은

조금만 펴거나 휘어도 뚝 부러지고 말 것 같은데

군데군데 구멍 난 혁명가를 입은 노인은

질긴 옛날 노래를 잇몸으로 부른다

 

극빈은 출렁이는 극한의 자세

팔꿈치에 휘감은 불안은 바짝 마른 저수지보다 컷다.

여전히 붙잡아두고 싶은 것들은 아름답지만

이 극빈도 조만간 헐릴 것이라는 만들

그래, 함께 헐리면 편하지

지탱이 지탱을 업고 하는 말들은 그마저도

죄다 빌려 온 말들이라는 것

돌려줄 곳도 없는 말들이라는 것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어둑한 한 평의 미궁들엔 다행이도

무더위가 웅크리고 있다는 것

들어올 것도 없이 여미는 겨울보다는 낫다는 것

홀로, 깊은 안쪽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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