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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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

박수현 시인의 시

박숙인 2022. 11. 28. 18:04



샌드 페인팅  / 박수현
                                                                                   





사막을 가로지르는 쌍봉낙타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바람은 능선의 기하학적인 장정裝幀을 지운다 바람과 모래의 입술이 맞닿은 텍스트는 다시 백지다 한기가 엄습하는 밤, 육탈한 뼈만 남는 단호한 시간 전갈좌가 밤새 사막의 지붕에 도사리고 있다 무주지無主地의 모래톱에서 별빛들이 붐빈다


아침
모래 능선이 노파의 턱밑 주름처럼 호를 그린다 밤새 곱은 손을 비비던 사막은 아침햇살에 사프란빛으로 쾌활하다 능선의 늑골을 향해 검은개미를 먹고사는 도깨비도마뱀이 기어가고 새들은 색종이 조각처럼 공중을 난다 어린 유칼리 나뭇잎들이 쟁쟁거리는 순간 모래 소용돌이를 온몸이 밀고 가는 캐러밴들


정오
모래들이 흰 하늘로 스타카토식 고음의 노래를 바친다 너무 많은 태양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극사실주의, 팽팽한 스테인리스스틸 판처럼 은유도 없는 시선뿐이다 모래 속에 묻어둔 타조알을 찾아 와디를 헤매거나 소금에 절인 짐승의 살코기를 먹인 까마귀를 쫓아 물을 찾는 삼부루족 여인들 발목을 지운 자코메티의 후예들이다


저녁
태양이 각도를 조금씩 눕히면 사막은 카엔후추빛 허밍을 낮게 부른다 낮이 다 타버린 자리에 노을은 낮과 밤을 가르는 도끼처럼 때론 에뮤 깃털 부츠를 신고 걸어온 발자국들을 빗질하며 찾아든다 저물녘, 낙타는 모래 속에 묻은 새끼의 울음소리로 사막을 건너고 차르르 모래 물결 따라 사막은 사라진 누란樓蘭의 방언을 써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밤


지하철 구로역 출구에서 초록 버스를 갈아탄다 버스의 yap 광고 화면, 엄지손가락으로 그린 모래 꽃다발이 여인의 긴 머리채로, 중지와 검지는 박쥐우산을 받쳐 든 남자와 공원의 벤치를 불연속적으로 배치한다 눈 감으면 나는 모래보다 가벼워지고 까슬한 모래 알갱이들이 내 목젖을 타고 흘러내린다 사막의 사구에 쟁여진 만다라曼茶羅들 모호크족 머리장식 같은 볏을 세운 새들이 어떤 그늘을 물고 머리 위를 빙빙 돈다 내 몸에는 철 지난 포도알 같은 눈알들이 매달리지만 뒤도 앞도 보이지 않는다 느리게 숨 쉬는 검보라빛 카라부란黑暴風이 행간 속에 묻어둔 울음을 흩뿌린다 차창 밖으로 벌써 백만 번째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曜日, 차빛귀룽나무




그 물가에는 차빛귀룽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햇귀를 끌어당겨 푸른 머리핀처럼 꽂고
심심해지면 고요 밖에서
한눈팔 듯이 제 몸을 비춰보기도 한다네
그러고 나면 어찌 눈치 채고 빈 데마다
쓸데없는 구름그늘끼리 몇 평씩 떠흐르네
낮결 내내 부젓가락처럼 아궁이를 뒤지던
부레옥잠도 어리연도 마냥 엎질러져
복사뼈째 찧으며 물소리를 나르네


한나절 봄빛을 덖어낸 차빛귀룽나무
조붓하고 어린 나비잠을 스치며
희디흰 산그늘 한 마리
드문드문 허기져서 느린 봄날을 건너네






매미




사내는 빨리 발견되길 바랐던 모양이다
산책로에서 겨우 서너 걸음 떨어진 나무에 목을 매었다
포로로 잡힌 무사의 방패와 투구처럼
자신의 점퍼와 벙거지 모자를 나뭇가지에 걸쳐두었다
벗어놓은 옷과 모자가 그의 생을 온전히 열어젖히지는 못했는지
끝내 연고자를 찾지 못했다
귓바퀴에 고인 매미의 울음을 퍼내느라
그는 눈조차 감지 못했을까
막 솟아오르는 태양이 활짝 열린 동공에 박힌 채
상한 생선처럼 허물어진 그의 시간을 비춰주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오신 날이라 일손이 달렸다며
반나절이 지나서야 구청차가 도착했다
1톤 트럭에 갈퀴 발을 겨우 얹고서
그는 성하盛夏의 숲을 덜컹거리며 건너갔다


시체검안서에 기록된 그의 이름은 2014-728A*
벗겨지지 않는 신발을 떼 내려 안간힘을 쓰는 마음에게
이제 무릎을 꺾지 않고 누울 수 있게 된 육체에게
그는 남은 소주를 한 모금씩 건네며
늑골 아래로 차오르는 청회색 미명을 바라보았을지 모른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을 시취屍臭
싱그러운 숲의 향기가 뒤섞인 그 산책로에선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일생을 울어도 다 지우지 못하는 목숨이 있다는 듯
그 여름 내내, 매미는
검은 곡비처럼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 2014년 고독사 중 728번째 죽음.






사과




에레나 할머니는 우리이웃, 그녀의 뜰에는
사과나무가 푸르다


가으내 그녀는 사과의 속살을 저며 애플파이나 사과를 밀가루 반죽에 싸서 구운 아펠슈투루델이나 혹은 팬케익 아펠판구헨을 굽는다 큰 유리병에 아펠바인을 담그기도 한다


오븐에서 사과 향이 익는 동안
유리병의 사과들이 발효하는 동안
할머니는 장미과 과일 중 가장 오래된 열매의 어둠을 갈무리 한다
사과는 그녀에게 시장기 같은 것
검지를 입술에 대며 쉿! 하던 아버지의 어두운 목소리 같은 것
숨죽여 베어 먹던 서늘한 사과의 기억
사과는 얼마나 자주 하켄크로이츠 나치 깃발을 나부끼게 했던가
사과와 탄피는 왜 둘 다 작고 반질거리는가
문지르면 왜 뽀드득 말간 소리가 나는가
버둥대며 끌려가다
뒤돌아보던 아버지의 핏발 선 눈동자
그때 소녀가 할 수 있는 건
사과가 흘린 핏자국들을 훔치며
썩은 사과처럼 지하실 구석을 굴러다니는 것 뿐


가을이 오면 사과나무는 여전히 붉게 기침을 한다
나무 바깥으로 자꾸 뛰쳐나가려는 북서풍의 후예들
그 옛날, 시베리아에서 코카소스 산맥을 넘어온 그것
캄캄한 제 심장에서 다섯 개의 별을 꺼낸다


사과로 만든 그녀의 디저트와 와인을 마시며
사과가 거느린 치사량의 둘레를 가늠하기엔
그해 가을은 너무 짧았다






      초승달, 




    
      봄볕에 마른 노랑을 한 번 더 말린다
      복수초가 밀어올린 귀때기 시린 노랑
      생강나무 가지에서 눈 부비는 새끼 노랑
      개나리 울타리에서 여기저기 떼 창하는 노랑


      노랑 원복 입은 아이들이 병아리 떼를 데불고
      종알종알 노랗게 나들이 간다
      봄 햇살을 빨아대는 어린 노랑들을 뒤집으니
      민들레, 씀바귀, 애기똥풀 꽃이 노랑 노랑 풀밭에 쏟아진다
      바람이 들판에다 노랑 바리케이드를 둘러친다
      젊은 연인들이 두고 간 새뜻한 노랑 속에
      언 발을 옹송거렸던 노랑턱멧새 한 마리
                                                    팽팽히 하늘 한 자락을 들어 올린다
   (  누가 이렇게 만들어 보내주었어요.)
                                                    누가 저 출렁이는 노랑들을 한 다발 묶어
                                                    별무늬 꽃병에다 꽂아 두었나
                                                    초승달 샛노랗게
                                                    돋아난, 삼월 어느 저녁






양말을 위한 변주곡




침대 밑에서 말린 딸의 고양이 캐릭터 발목양말을
소파 구석, 뒤집힌 남편의 줄무늬 양말 한 짝을 찾아낸다
아라베스크 무늬 내 수면 양말은
분명 세탁기 속에 넣었는데 또 한 짝이 달아났다
뒤꿈치에 구멍 난, 엄지발톱이 슬쩍 내비치는
그 양말짝들은 어디로 갔을까


양말에도 길들이 새겨져 있어
딸의 아메리칸 컬은 활처럼 등을 휘고
맹목적인 낙하라도 감행하려는 걸까
베란다 난간에서 불안을 말아 올리며, 야옹
거꾸로 매달려, 야옹 야옹


남편은 초원을 달리는 얼룩말을 보러
케냐행 비행기를 탔는지도 모른다
청동기 사내들처럼 양털 발싸개를 감고
얼룩말을 겅중겅중 쫒다가
바람이 흩어지는 움막으로 돌아오고 있을게다


나는 푸른 아스파한으로 간다
이맘 모스크의 아라베스크 연속무늬를 신고 따라가면
조붓한 골목 안 타일과 카펫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그곳에는 실삼나무, 대추야자 나무가 하늘로 뻗고
장미꽃들이 송이송이 포개진다
아스파한 로즈를 노래한 어느 시인처럼
나도 눈멀어 길을 건넌다
노천카페 유리호리병 안, 박하 향은 끓어오르고
긴 수염의 노인이 물 담배를 졸며 피운다


강변엔 검은 차도르들이 달디 단 오디를 줍고
자전거를 탄 젊은이들이 카주 다리 너머
그 옛날 페르시아로 간다


세탁 종료 벨이 울린다
휘뚜루마뚜루, 헐렁해진 양말들을 넌다
짝짝이 양발 사이를 지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 난 길로 떠난 너를 지나
아라베스크 자세로 밤이 오는 쪽,
나는 이스파한으로 간다




*압마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이란 영화


-시집『샌드 페인팅/2020년 2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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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샌드 페인팅을 읽다보면 올 칼라로 찍은 지구촌 구석구석의 오밀조밀한 풍경이 환하게 떠오른다. 모래로 그린 그림! 명암明暗과 원근遠近과 농담濃淡이 서로 밀고 당기며 충돌하는 언어의 불꽃에 손을 델 것 같다. 샌드 페인팅의 날카로운 솜씨로 그리는 삼라森羅의 이모저모가 화폭 가득 넘쳐난다.
박수현 시인이 놀리는 언어의 붓은 자칫 캔버스를 넘어 우주공간 블랙홀까지 닿을 것 같다. 그만큼 시의 구조나 중층적인 이미지의 결은 푸른 별 지구의 기원을 찾는 지질학적 탐사처럼 치밀하고 엄정하다.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隕石인듯 지구의 암흑에서 채굴한 금강석金剛石인듯! 사물이 지닌 시적 핵심을 찾아내는 시인의 눈씨는 바늘귀만치 좁고 작다가도 문득 맹수를 잡는 도끼날만치 섬뜩하니 빛난다.
티베트 인도 미얀마 터키 속 과거의 현실을 가로지르는 전지적 시점과 미국과 멕시코와 유럽 속 미래의 과거를 넘나드는 노마드nomad의 시점이 서로 눈싸움을 하면서 형상화된다. 여기서 충돌하는 시적 이미지는 가족과 이웃의 알콩달콩한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어느새 환상적인 리얼리즘의 묘한 신비감을 자아낸다.
태초에 사막은 바다였고 정글이었다. 사막의 모래는 호모 사피엔스의 생명이 탄생한 원형상징과 맞닿아 있다. 위험하고도 아득한 모래의 바다를 항해하는 박수현 시인의샌드 페인팅은 현대시의 지향점을 가늠해주는 정밀한 나침반 구실을 아주 잘 하고 있다.
-오탁번(시인. 고려대 명예교수)










박수현 시인



경북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운문호 붕어찜 』 『복사뼈를 만지다』, 『샌드 페인팅』
연합 기행시집 『티베트의 초승달』 『밍글라바 미얀마』 『나자르 본주』 등 출간.
2011년 서울문화재단 작가창작 활동 지원금 수혜.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 지원금 수혜.
현 시인협회 중앙위원. 〈온시溫詩〉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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