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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

오영숙 시인의 시

박숙인 2022. 12. 21. 17:47

오영숙 시인


경북 김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제12회 동서문학상 입상
2016년 시문학 등단
시집  꿈꾸고 싶어요 나는 아직도 
시인회의 동인

 

 

내 안의 국어사전 / 오영숙

 

 

내 입이 맨 처음 펼친 단어는 젖이었다

젖의 풀이말을 달다고 느낄 때 혀가 생겨났다

혀가 단맛을 발음할 때 심장이 생겨났고

심장 박동이 펼친 단어는 눈빛이었다

눈빛의 풀이말을 첫 생각에 담을 때 손이 생겨났고

손이 펼친 맨 처음 단어는 체온이었다

어머니 체온을 이불처럼 덮고 단잠에 들었다

꿈은 미처 풀이말을 달지 못한 채

차곡차곡 내 몸속에 쌓여만 갔다

머릿속에 쓸개라는 단어가 새로 등재될 때

꿈도 함께 어두워졌고

사람의 첫 파생어인 사랑을

사람으로 잘못 읽고 세상 밖을 떠돌았다

나를 사람 되게 한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기다림에 지친 눈꺼풀은

독해되지 않은 페이지처럼 접혀져 갔다

()이 가다듬어지지 않을 때마다

스스럼없이 찾던 어머니의 젖가슴은

다신 열리지 않는 봉분이었다

 

사랑이란 단어의 풀이말은 쓴맛이었다

 

 

 

벽화를 새긴 혀 /오영숙

 

 

언어가 있기 이전 사람들은

마음 한켠 전할 말을 찾지 못해

동굴에 벽화를 새기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갇힌 혀는 부싯돌처럼

손끝에 피 맺힌 줄도 모르고 그어대도

한 올의 무늬도 풀어내지 못할 때도 있다

 

밤이면 화덕 가에 둘러 앉아

사냥해온 고기를 구우며

수화를 하듯 동굴에 가벼운 깃털을 새겼다

 

칡넝쿨이 얽히듯 생각과 혀가 뒤엉킬 때

사슴한테 겨누어야 할 화살촉이 바위에 꽂혔다

 

서로 눈빛을 끌어당기던 날

캄캄한 동굴 안에서

붉은 숨결을 토해내는 혀는 사나운 짐승이었다

 

가끔은 서로 날선 혀로

불꽃 튀는 분노를 새겼다

 

 

눈빛과 표정이 한데 섞인 혀는

말보다 무서운 소통의 힘을 지녔다

 

 

결속 / 오영숙

 

봄볕 두터운 배추밭

할머니 따라나선 누렁개 한 마리

멀찌감치 밭둑에 앉아 있다

 

흙빛을 뒤집어쓴 할머니

긴 밭고랑에 코를 박고 호미질 한다

허리를 펼 때마다

흙빛 닮은 누렁개 한 번 쳐다보고

목화구름 떠가는 하늘 한 번 바라보고

무릎걸음으로 밀고 나온 밭고랑을 돌아본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누렁개

슬금슬금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

갈라터진 손등에 발바닥을 갖다 댄다

종일토록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아도

누렁개의 눈망울엔 깊은 생각이 담겨 있다

생각을 발톱에 모으고

밭고랑 사이 잡풀을 캔다

김을 매는 할머니 손에 힘을 실어준다

할머니의 호미질은 시들 줄 모른다

 

 

꿈의 갱도 / 오영숙

 

 

동틀 무렵부터 집을 나선 채탄 광부

어둡고 숨 막히는 갱도 속

탄 벽을 기둥삼아 더듬으며 들어간다

땅속은 보이는데 등 뒤는 보지 못한다

식솔들의 숨통을 이어가기 위해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숨을 참아야 한다

탄가루를 들이켜 숨소리조차 검게 진화된 그는

눈자위와 이빨만 하얗게 드러낸 채

온몸에 젖은 탄 꽃을 피운다

 

대대로 이어오던 갱도를 탯줄처럼 자르고

어둠 속을 헤치며 지상으로 빠져나온다

땅 멀미를 앓으며 쓰러질 듯하면서도

하늘빛을 보는 순간 하얗게 웃는다

종일토록 탄가루에 절은 땀

씻을수록 점점 검은 꽃이 핀다

한참 어루만져야만 생기를 띠는 꽃

비누는

제 몸의 살을 풀어 어둠을 닦아낸다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킨 그는

다시

달콤한 꿈의 갱도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탔으면 갈 일이지 / 오영숙

 

 

엘리베이터 안

어디서 몰려왔는지

젖은 가랑잎들이 금세 가득 찼다

온갖 비바람을 혼자 다 겪은 듯

살갗마저 우둘투둘한 더덕도 섞여 있다

어느 틈에 끼어들었는지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새 한 마리

휘파람을 불며 날아들어 왔다

따가운 눈총에 떠밀려

잽싸게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맨 나중에 타신 분 내려주세요

마지못해 가랑잎 한 잎 내렸는데도

올라갈 기척이 없자

누군가가 거칠게 소리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늙다리 더덕 한 뿌리 또 내렸다

무슨 미련 있었든지 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던 헌털뱅이 한마디

-탔으면 갈 일이지 왜 안 가

순간, 호박꽃이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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