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오영숙 시인의 시 본문
오영숙 시인
경북 김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제12회 동서문학상 입상
2016년 《시문학 》등단
시집 『 꿈꾸고 싶어요 나는 아직도 』
시인회의 동인
내 안의 국어사전 / 오영숙
내 입이 맨 처음 펼친 단어는 젖이었다
젖의 풀이말을 달다고 느낄 때 혀가 생겨났다
혀가 단맛을 발음할 때 심장이 생겨났고
심장 박동이 펼친 단어는 눈빛이었다
눈빛의 풀이말을 첫 생각에 담을 때 손이 생겨났고
손이 펼친 맨 처음 단어는 체온이었다
어머니 체온을 이불처럼 덮고 단잠에 들었다
꿈은 미처 풀이말을 달지 못한 채
차곡차곡 내 몸속에 쌓여만 갔다
머릿속에 쓸개라는 단어가 새로 등재될 때
꿈도 함께 어두워졌고
사람의 첫 파생어인 사랑을
사람으로 잘못 읽고 세상 밖을 떠돌았다
나를 사람 되게 한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기다림에 지친 눈꺼풀은
독해되지 않은 페이지처럼 접혀져 갔다
생(生)이 가다듬어지지 않을 때마다
스스럼없이 찾던 어머니의 젖가슴은
다신 열리지 않는 봉분이었다
사랑이란 단어의 풀이말은 쓴맛이었다
벽화를 새긴 혀 /오영숙
언어가 있기 이전 사람들은
마음 한켠 전할 말을 찾지 못해
동굴에 벽화를 새기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갇힌 혀는 부싯돌처럼
손끝에 피 맺힌 줄도 모르고 그어대도
한 올의 무늬도 풀어내지 못할 때도 있다
밤이면 화덕 가에 둘러 앉아
사냥해온 고기를 구우며
수화를 하듯 동굴에 가벼운 깃털을 새겼다
칡넝쿨이 얽히듯 생각과 혀가 뒤엉킬 때
사슴한테 겨누어야 할 화살촉이 바위에 꽂혔다
서로 눈빛을 끌어당기던 날
캄캄한 동굴 안에서
붉은 숨결을 토해내는 혀는 사나운 짐승이었다
가끔은 서로 날선 혀로
불꽃 튀는 분노를 새겼다
눈빛과 표정이 한데 섞인 혀는
말보다 무서운 소통의 힘을 지녔다
결속 / 오영숙
봄볕 두터운 배추밭
할머니 따라나선 누렁개 한 마리
멀찌감치 밭둑에 앉아 있다
흙빛을 뒤집어쓴 할머니
긴 밭고랑에 코를 박고 호미질 한다
허리를 펼 때마다
흙빛 닮은 누렁개 한 번 쳐다보고
목화구름 떠가는 하늘 한 번 바라보고
무릎걸음으로 밀고 나온 밭고랑을 돌아본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누렁개
슬금슬금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
갈라터진 손등에 발바닥을 갖다 댄다
종일토록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아도
누렁개의 눈망울엔 깊은 생각이 담겨 있다
생각을 발톱에 모으고
밭고랑 사이 잡풀을 캔다
김을 매는 할머니 손에 힘을 실어준다
할머니의 호미질은 시들 줄 모른다
꿈의 갱도 / 오영숙
동틀 무렵부터 집을 나선 채탄 광부
어둡고 숨 막히는 갱도 속
탄 벽을 기둥삼아 더듬으며 들어간다
땅속은 보이는데 등 뒤는 보지 못한다
식솔들의 숨통을 이어가기 위해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숨을 참아야 한다
탄가루를 들이켜 숨소리조차 검게 진화된 그는
눈자위와 이빨만 하얗게 드러낸 채
온몸에 젖은 탄 꽃을 피운다
대대로 이어오던 갱도를 탯줄처럼 자르고
어둠 속을 헤치며 지상으로 빠져나온다
땅 멀미를 앓으며 쓰러질 듯하면서도
하늘빛을 보는 순간 하얗게 웃는다
종일토록 탄가루에 절은 땀
씻을수록 점점 검은 꽃이 핀다
한참 어루만져야만 생기를 띠는 꽃
비누는
제 몸의 살을 풀어 어둠을 닦아낸다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킨 그는
다시
달콤한 꿈의 갱도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탔으면 갈 일이지 / 오영숙
엘리베이터 안
어디서 몰려왔는지
젖은 가랑잎들이 금세 가득 찼다
온갖 비바람을 혼자 다 겪은 듯
살갗마저 우둘투둘한 더덕도 섞여 있다
어느 틈에 끼어들었는지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새 한 마리
휘파람을 불며 날아들어 왔다
따가운 눈총에 떠밀려
잽싸게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맨 나중에 타신 분 내려주세요
마지못해 가랑잎 한 잎 내렸는데도
올라갈 기척이 없자
누군가가 거칠게 소리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늙다리 더덕 한 뿌리 또 내렸다
무슨 미련 있었든지 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던 헌털뱅이 한마디
-탔으면 갈 일이지 왜 안 가
순간, 호박꽃이 활짝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