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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

우물, 11월/ 박수현

박숙인 2022. 12. 19. 17:49

우물, 11

 

박수현

 

 

첨벙, 뒤꼍 우물에 두레박을 부린다

이끼 낀 돌팍에 부딪히는 두레박 소리가

이적 저지른 죄들이 늑골을 타고 수직 낙하한다

흑백의 기억이 물방울을 튕기며

동심원을 그리는 그곳

 

두레박 속엔 노루꼬리 햇살 한 줌과

삭아 잎맥뿐인 상수리 잎새 몇 장뿐

여름은 적도의 스콜처럼 성급했고

지퍼를 목까지 올린 가을은

잰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았다

당도하지 않은 크리스마스 캐럴은

낯선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겨울은 왜 더 멀리 돌아가서 맞고 싶은 것일까

나는 그저 성글어진 나무 우듬지에 가닿는 새소리를 듣거나

겨울이 데리고 올 이야기의 페이지나 무심하게 넘기며

물끄러미, 달의 뒷면을 비끼는 두레박을 바라보았다

현관 밖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가는 신문지 더미처럼

이제 우물은 가물어서

아무도 두레박을 던지러 오지 않을 것이다

 

먼 곳으로 가는 새떼들이 하늘 어디쯤을 건너는지

죄지은 듯 십일월의 이마를 짚어본다

내가 신열을 앓는다

 

 

계간 문학과 창작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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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 /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 시안으로 등단. 시집 운문호 붕어찜』 『복사뼈를 만지다』 『샌드 페인팅. 온시溫詩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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