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우물, 11월/ 박수현 본문
우물, 11월
박수현
첨벙, 뒤꼍 우물에 두레박을 부린다
이끼 낀 돌팍에 부딪히는 두레박 소리가
이적 저지른 죄들이 늑골을 타고 수직 낙하한다
흑백의 기억이 물방울을 튕기며
동심원을 그리는 그곳
두레박 속엔 노루꼬리 햇살 한 줌과
삭아 잎맥뿐인 상수리 잎새 몇 장뿐
여름은 적도의 스콜처럼 성급했고
지퍼를 목까지 올린 가을은
잰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았다
당도하지 않은 크리스마스 캐럴은
낯선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겨울은 왜 더 멀리 돌아가서 맞고 싶은 것일까
나는 그저 성글어진 나무 우듬지에 가닿는 새소리를 듣거나
겨울이 데리고 올 이야기의 페이지나 무심하게 넘기며
물끄러미, 달의 뒷면을 비끼는 두레박을 바라보았다
현관 밖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가는 신문지 더미처럼
이제 우물은 가물어서
아무도 두레박을 던지러 오지 않을 것이다
먼 곳으로 가는 새떼들이 하늘 어디쯤을 건너는지
죄지은 듯 십일월의 이마를 짚어본다
내가 신열을 앓는다
⸺계간 《문학과 창작》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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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 /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운문호 붕어찜』 『복사뼈를 만지다』 『샌드 페인팅』. 〈온시溫詩〉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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