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지정애 시인의 시 본문

[시인의 마을 ]

지정애 시인의 시

박숙인 2022. 12. 6. 20:38

마흔여섯 채의 슬픔 / 지정애

 

너는 매일 천 개의 밤을 건너고
나는 매일 천 개의 해를 찾아다니느라 발이 부었다
너 떠나고 난 뒤
첫서리 같은 난데없는 한기가 나를 덮쳐오는 동안
나는 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지난날들의 고혹과 병증을 어루만진다
텅 빈 얼굴 속의 바싹 마른 입술과 입술이 만나
생의 바닥을 적셨던 날들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복사꽃빛 한 마디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내 전부를 네게 들이밀면
네 뼛속 살 속에 맺혀 있을 이슬방울이 내 머리카락을 축이고
네 전부를 껴안으면
삭정이같이 삭은 어깨에서 제비꽃 피어난다


네가 천 개의 밤을 건너는 동안
나는 들길의 풋순 같이 쑥쑥 자랐다
네가 건네어 온 한 줌의 온기에
천 년 전의 소식 같은
마른 얼굴을 다시 보며,
네가 첫봄처럼 내게 오던 날을 생각한다
보아라, 손 없이 손잡는 저 꽃들, 풀들
저 여린 것이 끝내 열매가 되는 순서를
아가의 숨결같이 피어나는 너를 바라보며
나 이제 이 세상에 없는 마음의
집 한 채 짓고
그 고요 속 소슬한 난간에
나를 눕힌다

 

 


던킨 도너츠 / 지정애

 

 

당신, 던킨 도너츠 먹을 땐 주의하세요


초코렛 듬뿍 발린 던킨 도너츠 한 개
섬벅 베어 먹는 순간
유형의 시절 당신을 물어뜯기만 했던 잔혹한 사랑이
입 속으로 확 들어 올 거예요
오래 낯설었던 입김이 당신의 혀를 덮치는 순간 우우,
아무 말도 못하네요, 당신
끝까지 당신을 갉아 먹으면서
기차를 타고 가버린 사랑, 이젠 입 속에서 꼼짝 못할 거예요
그 병신 같은 사랑을 뒤늦게라도 우적우적 씹어 보세요
오래된 사랑의 먼 냄새에 뒷덜미 잡히지 말고
입 안 가득 차오르는 복수의 붉은 향기에 쾌재를 부르세요
잠깐, 입 속에서 녹아 흐르는 그 입술에
당신은 또 몽롱히 빨려들어갈지도 모르겠네요
기차는 떠나고 장미는 지고
꽃 진 자리 흉터는 감미로워
당신의 혀가 날름거릴지도 몰라요
있는 듯 없는 듯 가라앉아 있던 흉터가
푹 꺼진 눈 허기진 배 보이며
당신에게 달려 들 거예요


던킨 도너츠 먹을 땐 정신을 바짝 차리세요
유효기간 지나간 사랑에 먹혀버릴지도 모르니까요

 

 


분홍고래 / 지정애

 

 

분홍색으로 바디페인팅 된 이삿짐차
푹 꺼진 배 밀며 들이닥친다
수십 개 박스로 요약된
수년 간 살림들
마구 삼켜 불룩해진 분홍고래
꽃미남 캐릭터 그려진 꼬리지느러미
살짝 들어 올려 물살 가르며 달린다
늘 드나들던
빵집과 서점을 지나고 김밥나라 지나
하늘 닿은 고가도로 휘익 내려와
여의도 마천루 꼿꼿이 지날 때
세 평 방 열대야와 밤새 싸우던 선풍기
사이다 맛 한강 바람에 다시 돌아가고
덜거덕거리는 서랍은 분홍고래 수염 잡고 바둥거린다
모두 다 포장하는 시대에 누드가 되어도 즐거운 건
한 번씩 솟구칠 때마다 보이는
먼 수평선 때문
고단한 세간들 모처럼 하늘 보며 꿈꾸는 시간
지느러미 살랑이며
신림동 고불고불 들어서니
어정거리던 은빛 물고기들 슬슬 피하고
소라기둥 앞에 멈춘다
지끈거리는 두통 바람에 날려 보낸 육법전서들
햇빛 아래 어깨 들썩인다
후줄근한 살림 갈피갈피 푸우
숨 불어넣으며 배 꺼지는 분홍고래

 

 


고래와 분홍신 / 지정애

 

 

목조 교실 흐릿한 창문 너머 있는 ‘분홍신’에 얼굴 박고 여러 날 서성이곤 했던 적 있어요 꿈결에 언뜻 비치기도 하다가, 출근하는 당신의 손바닥에 ‘동화책’이라고 아침마다 비뚤비뚤 새겨 넣었지요 저 너머 있을 눈부신 에메랄드빛 바다를 몇 개라도 건너고, 구름국화 넘실거리는 산언덕에서 하늘에 폴짝 뛰어올라 높이 높이 날고 싶었지요


두근거리는 아홉 살 맨발은 햇살로 엮은 줄넘기 넘으며 느릿느릿 걸어오는 어스름에게 달음박질하며 갔어요 담장 내다보던 깨금발, 골목길 휘감는 텅 빈 바람 소리 들으며 다락방으로 스르르 들어갔어요


서른일곱 살 당신은 생에 흘러드는 몇 천 볼트의 봄을 움켜잡으며 고래가 되어갔지요 밤낮으로 몸 안에서 출렁이는 붉은 피에 몰려 먼 바다까지 헐떡거리며 떠나가는 당신의 생, 점점 부풀어갔지요 높아져 가는 계단 올라가는 당신의 어깨 불끈 솟구치고, 당신은 점점 가물가물해져 갔어요 커다란 손으로 우리의 바다까지 끌어모아 도시를 가로질러가고 나면, 우린 바짝 마른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점점 커져가는 구두 발자국 소리 들었어요

당신이 뜨거운 지느러미 흔들며
방을 밀고 들어오면
우린 숨소리 죽이며 벽 속에 들어가 잠을 잤어요
수평선 철커덕 닫히는 소리
곤두박질친 별 나뒹구는 소리
꿈결에 들으며
아홉 살 맨발은 누런 이불에 젖은 얼룩 꽃을 피웠어요
당신은 아실까요?
순한 눈망울의 아이가 그렁그렁한 연둣빛 꿈을
닳고 닳은 만화책 갈피 속에 접어 넣으며 잠든 것을

 

 


산수유나무 까페 / 지정애

 


구름이 몰려온다는 예보만 들어도 코에 단내 나는 날
빨간 캡을 쓰고
산수유나무 까페가 문을 여는 숲실마을에 간다
왕산수유나무 삼백 년 묵은 고집이 피우는 향기와
웅숭깊은 그늘 수북한 까페에서
한나절 푸지게 자다 일어나면
엉켰던 길에서 풀잎 같은 새살이 돋을까


끝없는 생을 번져
숲실 마을의 서낭당이 된 산수유
햇빛 한 줌과 노란 그늘이
세상없는 열매 익히는 소리에
고단한 시간 헹구어 낸 사람들,
구름과 바람의 모잘 벗어 던진다
환하게 꽃 핀 얼굴들
노을 진 걸음이 가볍다


까페의 그 많은 의자는 무슨 생각하며 시간 보낼까
앉은 자리마다 고여 있을 먼지와 內傷의 흔적들
또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리라
산수유나무에 대한 예의로 신은 구두의 먼지가
구름 가루이길 바라는 동안
왕산수유나무 옆에 있던 작은 저수지가 내려왔는지
내 마음 속에서 물살 소리가 난다

 

- 제16회《서정시학》신인상 당선작 -

 

 

강가 카페 / 지정애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격했던 시간들 내 몸에서 서서히 빠져나가고

짓물렀던 슬픔도 엷어진 이제

내 품으로 돌아온 생이

몇 백 년 된 나무를 껴안고 숨을 고르는 동안

케냐의 뜨거운 태양이 녹아 있는 커피를 마신다

햇살의 비늘을 쪼며 줄지어 가는 오리들

마음 한 켠의 그늘은 물 위로 흘러가고

빈 숲속의 고요가 부르는 소리 들린다

끊어졌던 길로 다시 돌아가면

부르다 만 노래는 아직 따스하고

햇살 한 자락 내려앉은 꽃의 이마는 눈부시다

모든 상념들은 잦아들고

나는 먼 하늘빛에 물들어간다

내일, 풀빛 아침의 등에 업힌 햇살과

나를 지나쳤던 별들이 찾아 와

검은 커튼 쳐진 추억의 집을 밝혀주리

 

시하늘 2012 봄호

 

 

 

속삭이는 바나나 / 지정애



한때 나는 항아리에 은닉되곤 했지요
독점욕이 강한 사람들이 내게 새로운 세계를 가르쳐 줬어요
무풍지대와 그늘이 있어 엄마의 자궁처럼 안락했어요

늘 웅크리고 있는 내게 다시 태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오곤 해요
그때 나는 과일을 넘어선 그 무엇이 되는 거지요

나의 단맛은 몽정 같은 것
한 다발이면 맨홀 같은 하루를 채워줄 수 있을 거예요
나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실컷 숨으세요
새 탯줄을 잡은 기분이 들 때까지

글러브처럼 포획을 노리는 나의 전략, 슈가 포인트엔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있어요

씨 없는 나는 혼신의 향기로 모두의 연인이 되는 거지요
비밀이 너무 많으면 몽상으로 등이 휘어진 나처럼 될 수 있어요

나의 길쭉한 색깔은 가위눌린 사람의 노란 하늘과 비슷해요
퍼렇게 시치미 뗀 나는
오늘도 해먹처럼 흔들리는 사람을 기다려요




몽돌의 뒷모습/ 지정애




모래톱에서 통증은 따스해진다

갈매기를 보면 질문이 생각난다
나는 질문하는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다시 모래를 밟으면
내 안과 밖에 어른거리는 것이 있다

나는 차츰 나를 잊어가고 내게서 멀어져간다
파도소리에 둥글어져간다

저마다 모서리를 없애는 방식이 있다
아무도 모르게 눈시울 문지른 당신

당신은 먼 바다의 돌로
금방 낳은 알처럼 따스한 돌로 내게 온다

지난겨울 당신은
돌을 붙들고 돌을 닮자고 했다

그러나 봄이 오고 당신은 떠났다

이제 당신은 내 손에 돌로 남았다
반질반질해진 돌로

옆에 있는 듯 알록달록 기운 얼굴을 만지작거리면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둥글어진다



⸻시집 『속삭이는 바나나』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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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애 / 경북 안동 출생.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계명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대구 상서고등학교 교사 역임. 2009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 『속삭이는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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