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유성애 시인의 시 본문

[시인의 마을 ]

유성애 시인의 시

박숙인 2023. 8. 15. 15:02
나는 어떤 계절이었을까/ 유성애


비 갠 아침, 창 너머로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당에 막 피기 시작한 선홍빛 장미 뒤로
너른 공터에 빼곡한 개망초 군단
앞산의 초록은 더욱 깊어져 개망초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티끌 하나 없이 말간 하늘이
그 산을 살포시 껴안고 있다


한 폭의 완벽한 풍경을 위해
철따라 몸을 바꿔가며
서로를 받쳐 주는 삶이란 저런 것일까


절망의 나날을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된다는 건
착각이고 오만이었다


여름 한 철 피었다 지는 생
지금 이순간이 황금기라는 듯
사나운 바람 앞에서도 의기양양한 개망초가 부러워졌다


살면서 주인공을 탐한 적 없었다
그럴 듯한 조연이 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렇게 수많은 계절을 허비한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그리움은 진짜 그리움이 아니다 / 유성애


마음에 새긴 그림이 그리움이라는데
입으로 말하지 말고
글로도 옮기지 말고
아무도 몰래 마음에 새겨야 진짜 그리움이라는데

해질녘 비단뱀처럼 골목을 누비던 피아노 소리와
오월 들판에서 놓쳐버린 배추 흰나비는 어디에 새겨야 할까
꿈에서도 바라보고
닳도록 매만져주었지만
끝내 미완성인 그림 몇 점
이제 그만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것은 모두 시가 되었다

그러니까 내 그리움은 진짜 그리움이 아니다

그림 들일 데를 만들지 않으니
온종일 바람이 불어도 쓸쓸하지 않다
쑥부쟁이 꽃잎이 져버려도 아프지 않다

쓸쓸하지 않고 아프지도 않다고
나는 자꾸만 쓰고 싶어지는 것이다



붉은 장미 책갈피 / 유성애


그대가 즐겨 쓰는 라벤다향 비누냄새와
부드럽게 젖어있는 오른손 검지를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가 등 구부려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붉디붉은 장미로 피어났으니까요


창가의 키 작은 책꽂이에서
골방의 책장속으로까지 흘러 오면서도
침묵이 이리 길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지금 이곳은 햇살 한줌 들지 않는 감옥
어쩌다 불어오는 바람결조차 나를 비켜갑니다만
문 활짝 열고 들어와 내 여윈 어깨 위에
얹어줄 그대 손길을 늘 꿈꾸고 있습니다


무심하게 내달리는 초침소리가
쿵 쿵 가슴을 칩니다
어둠속에 웅크린 내 온몸은 귀가 되어
작은 발자국소리에도 촉수를 세웁니다
손끝에 묻은 그 체온 다 식어버렸지만
행간 하나하나에 배어있는 숨결
갈피갈피 낡아가는 지문을 읽고 또 읽습니다
생의 한 페이지에 쓰윽, 나를 끼워 넣고는
까맣게 잊고 살아온 그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넘어가버린 페이지가
문득 떠올라 펼쳐든 책속에서
내가 툭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대가 어?, 하고 놀라기라도 한다면




세꼬시 /유성애




어디서 보았을까
선한 살집 속에 보란 듯이 버티고 있는
저 완고한 뼈!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어
입속에 쟁여둔 말
하나쯤
누구에게나 있다!




앙코르와트 /유성애




소녀의 바구니에선 쉰 빵 냄새가 났다


어느 행성에 머물다 왔기에 소녀는 아직 맨발인가




세상 모든 우산을 잃어버릴 우산이다/ 유성애




허구한 날 너는 뼛속까지 흠뻑 젖어서 온다 한때 너에게 하나밖에 없는 우산이 되고
싶었던 적 있다 나는, 팔월의 살얼음판 위에서 문득 소낙비를 생각한다 때늦은 저녁
인사가 공중에서 나부끼다가 흩어져버린다 세상이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인다 마악
장마가 시작되었는데 너는 소름이 돋을 만큼 춥다고 한다 또다시 비가 쏟아질 듯 후
덥지근하다고 중얼거린다 언제부터인가 일기예보를 믿지 않는 나는 무작정 비를 기
다린다 언제 다 가져다 놓았을까? 살이 부러지거나 찢겨져 못쓰게 된 이 많은 우산들
······ 나는 햇살의 따스함과 살가운 바람을 기억하려 연신 현관문을 기웃거린다 회
색빛 창 너머로 내내 눈이 갔던 어젠, 몹시 습했고 그저껜, 갑자기 천둥번개가 쳤고 또
그그저껜, 구름이 오락가락했었다고 말하려는데 너는, 반짝 드러난 하늘이 그저 반가
운 눈치다 남모르게 말려야 하는 눈물을 모르는 척, 서둘러 햇살 속으로 멀어져 간다

 

유성애시인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시창작전문과과정 수료.

2016년 《문학의 오늘》 여름호에 「그림자들」외 1편을 발표하여 작품활동 시작.

시집 『세상 모든 우산은 잃어버릴 우산이다』 (시인동네시인선082)

'[시인의 마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수현 시인의시  (2) 2022.12.21
오영숙 시인의 시  (0) 2022.12.21
우물, 11월/ 박수현  (1) 2022.12.19
이향숙 시인의 시  (0) 2022.12.17
지정애 시인의 시  (0) 2022.12.06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