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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인의 시, 그리고
오동꽃은 지면서 비를 부른다 /홍해리 온몸에 오소소 솟아 있는 반짝이는 작은 털 더듬이 삼아 오동꽃 통째로 낙하하고 있다 보일 듯 말 듯 아주 연한 보랏빛으로, 시나브로 동백꽃 지듯 툭! 툭! 지고 있다 처음으로 너를 주워 드니 끈끈한 그리움이 손을 잡는다 무작정 추락하는 네 마지막 아름다운 헌신, 하나의 열매를 위해 나도 이렇듯 다 포기하고 그냥 뛰어내리고 싶다 떨어져 내린 꽃 위로 공양하듯 또, 비가 두런두런 내리고 있다
투명한 슬픔 /홍해리 봄이 오면 남에게 보이는 일도 간지럽다 여윈 몸의 은빛 추억으로 피우는 바람 그 속에 깨어 있는 눈물의 애처로움이여 은백양나무 껍질 같은 햇살의 누런 욕망 땅이 웃는다 어눌하게 하늘도 따라 웃는다 버들강아지 솜털 종소리로 흐르는 세월 남쪽으로 어깨를 돌리고 투명하게 빛난다 봄날은 스스로 드러내는 상처도 아름답다.
개화開花 / 홍해리 바람 한 점 없는데 매화나무 풍경이 운다 아득한 경계를 넘어 가도 가도 사막길 같은 날 물고기가 눈을 뜬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꽃 피는 소리에 놀라 허공에서 몸뚱이를 가만가만 흔들고 있다 꽃그늘에 앉아 술잔마다 꽃배를 띄운던 소인묵객騷人墨客들 마음 빼앗겨 잠시 주춤하는 사이 뼈만 남은 가지마다 폭발하는, 오오, 저 푸른 화약花藥 내!
1) 그리움을 위하여 / 홍해리(洪海里) 서로 스쳐 지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너를 보고 불러도 들리지 않는 너를 허망한 이 거리에서 이 모래틈에서 창백한 이마를 날리고 섰는 너를 위하여, 그림자도 없이 흔들리며 돌아오는 오늘밤은 시를 쓸 것 만 같다 어두운 밤을 몇몇이 어우러져 막소주 몇 잔에 서 대문 네거리 하늘은 더 높아 보이고 두둥럿이 떠오른 저 달도 하늘의 술잔에 젖었는지 뿌연 달무리를 안고 있다 잠들기 전에 잠들기 전에 이 허전한 가슴으로 피가 도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 네 속에 있는 나를 내 속에 있는 너를 우린 벌써 박살을 냈다. 아득한 나의 목소리 아득한 너의 목소리 아득한 우리 목소리.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썩은 사과 냄새에 취해 나는 내 그림자도 잃고 헤매임이여. 흙벽에 등을 대고 듣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