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김지녀의 「모딜리아니의 화첩」 감상 / 송재학 본문
김지녀의 「모딜리아니의 화첩」 감상 / 송재학
모딜리아니의 화첩
김지녀
목이 계속 자란다면
액자의 바깥을 볼 수 있겠지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에서
얼굴과 얼굴과 얼굴의 간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무너질 수 있겠지
붉은 흙더미처럼 나의 얼굴이
긴 목 위에서 빗물에 쓸려나가네
꼿꼿하게 앉아서
갸우뚱하게
―시집 『양들의 사회학』 2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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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긴 목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면 긴 목의 슬픔도 알 수 있게 된다. 모딜리아니의 목은 애처로운 현실이 고스란히 화폭에 투영된 결과물이다. '목이 길고 텅 빈 아몬드 눈'을 가진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가난과 육체의 고통 탓이다. 눈동자가 없는 눈은 감정 너머의 감정을 싣고 있다. 가난과 병든 육체의 상징이 아름다운 것은 눈물겨운 나와 우리의 몸이라는 진정성이기 때문이다. 그 통점에서 시인은 긴 목 너머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에서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시인은 모딜리아니의 목이 더 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액자의 바깥, 또 다른 세상을 보려면 목이 더 길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너무 슬프다.
송재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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