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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시 읽기]

사라진 사람들은 부엌에 모여 산다 / 권현형

박숙인 2024. 4. 12. 13:02

사라진 사람들은 부엌에 모여 산다

 

권현형

 

고요가 유리그릇에 담겨 정교하게 부서진다

사라진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곳은 부엌,

명절 가까운 10월엔 사람보다 구름이 살아 있다

 

빈집 부엌에서 이십 년 전에 들었던 탄식과 웃음소리를

뭉게구름의 중얼거림처럼 듣는다

향연이 끝나고 외할머니와 이모와 외삼촌이 차례대로 사라졌다

사라진 사람들은 부엌에 모여 사나?

오래된 냄비와 사발을 씻을 때마다

고요가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곤 한다

 

낡은 싱크대에 붙어 있는 라디오를 통해

엘피판으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운 좋게 만나기도 하나

모계의 혈관을 타고 사람 소리가 먼 곳에서 흘러온다

몸은 사라져도 소리가 남는다

 

홀로 있는 사람은 쇳덩어리 돌덩어리와도 교감한다

홀로 있던 외할머니는 거실 유리창으로 내다보며

수많은 자동차와 바퀴와 말을 나누곤 했다

저 많은 차들이 누굴 만나러 가나누굴 만나고 오나

쇳덩어리 고독을 돌덩어리 고독을 모른 척했다

고독을 모른 척하는 죄의식을 모른 척했다

 

식구들을 위해 음식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부엌에서

해물탕을 배달시켜 먹으며 기억의 소매가 젖도록 운다

수돗물과 함께 불가사의한 생을 위해 울게 될 줄 몰랐다

 

 

             —계간 예술가》 220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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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형 강원도 주문진 출생경희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시집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꽃아』 『포옹의 방식』 『아마도 빛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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