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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시 읽기]

매일밤 우리가 해왔던 노동 / 김소연

박숙인 2024. 4. 12. 13:16

매일밤 우리가 해왔던 노동

 

 김소연

 

우리는 눈사람처럼 녹아내리는 연습을 했습니다

 

녹지 않을 가능성을 희망한 적도 있었으나

그런 희망은 아주 잠시 스쳐갈 뿐

녹을 때를 기다리며 연습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환한 정류장에 세워둡니다

 

8차선 도로 한가운데에 세워두어도 상관없지만

세워두든 눕혀놓든 큰 차이는 없지만

 

우리는 죽은 해파리처럼 해변에서 나뒹구는 훈련을 했습니다

투명해서 미끌거려서 부서져서

이게 뭐야신발 코나 작대기로 누군가 툭툭 치다가

 

이내 돌아서도 기억에 남을 리가 없는 것

죽은 참새처럼 누군가 손바닥에 담아가

자그마한 무덤을 만들어 줄 리도 없는 것

 

우리는 심해를 누비느라 좀 쉬고 싶다는 듯이

휴식과도 같은 훈련을 해보았습니다

 

겨울을 견디는 나무들도 흉내내보았나요?

여름을 즐기는 때와는 다른 열정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어금니를 깨물다가 쌍욕이 신음이 비명이 새어나오기 직전일 때에

 

잠깐 죽은 셈 치자 하는 마음으로

 

생각해봐자세히 봐봐그 자세로 수백 번의 겨울을 통과했다는 것

믿기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는 없는 것을 흉내내보았나요?

 

우리는 혹한에도

땡볕에 대한 시를 쓰고 싶어했습니다

비지땀이 흘러서 턱밑에 고였다 떨어지고 머리카락이 축축해지도록 뛰어다니며

 

땡볕 아래를

드넓고 끝없고 눈부신 그 아래를 우리는

 

조만간 눈사람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머지않았습니다

 

 

계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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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촉진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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