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매일밤 우리가 해왔던 노동 / 김소연 본문
매일밤 우리가 해왔던 노동
김소연
우리는 눈사람처럼 녹아내리는 연습을 했습니다
녹지 않을 가능성을 희망한 적도 있었으나
그런 희망은 아주 잠시 스쳐갈 뿐
녹을 때를 기다리며 연습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환한 정류장에 세워둡니다
8차선 도로 한가운데에 세워두어도 상관없지만
세워두든 눕혀놓든 큰 차이는 없지만
우리는 죽은 해파리처럼 해변에서 나뒹구는 훈련을 했습니다
투명해서 미끌거려서 부서져서
이게 뭐야? 신발 코나 작대기로 누군가 툭툭 치다가
이내 돌아서도 기억에 남을 리가 없는 것
죽은 참새처럼 누군가 손바닥에 담아가
자그마한 무덤을 만들어 줄 리도 없는 것
우리는 심해를 누비느라 좀 쉬고 싶다는 듯이
휴식과도 같은 훈련을 해보았습니다
겨울을 견디는 나무들도 흉내내보았나요?
여름을 즐기는 때와는 다른 열정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어금니를 깨물다가 쌍욕이 신음이 비명이 새어나오기 직전일 때에
잠깐 죽은 셈 치자 하는 마음으로
생각해봐, 자세히 봐봐. 그 자세로 수백 번의 겨울을 통과했다는 것
믿기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는 없는 것을 흉내내보았나요?
우리는 혹한에도
땡볕에 대한 시를 쓰고 싶어했습니다
비지땀이 흘러서 턱밑에 고였다 떨어지고 머리카락이 축축해지도록 뛰어다니며
땡볕 아래를
드넓고 끝없고 눈부신 그 아래를 우리는
조만간 눈사람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머지않았습니다
—계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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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촉진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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