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양말 (외 1편) / 서진배 본문
양말 (외 1편)
서진배
거 봐라 네가 가진 자루가 작더라도 왼쪽 오른쪽 나누어 담으면 너를 다 담을 수 있잖니,
너를 붙잡을 곳 마땅치 않아 들고 걸어가기 어려울 때는 너를 자루에 담아 들고 걸어가면 한결 편할 거야
방으로 드는 식당에서 너를 구멍 난 자루에 담아 왔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너는
그 구멍으로 줄줄 새는 너를 들키고 싶지 않아 발을 숨겨야 할 거야
자루를 아무리 당겨 올려도 자루는 내 무릎도 담지 못할 뿐인데요
네 발만 담아도 너를 자루에 담는 거란다
황금색 계급장을 찬 어깨 앞에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는 것만으로도 떨고 있는 너를 감출 수 있거든,
쓰레기봉투에 너를 조금이라도 더 담으려 발을 넣고 밟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야
유리 거울처럼 깨진 너의 얼굴 조각들이 그 안에 담겨 있는 줄도 모르고,
그러니,
너를
나누어 담아라
눈물도 왼쪽 눈 오른쪽 눈 나누어 담으면 넘치지 않잖니,
이름
엄마는 늘 내 몸보다 한 사이즈 큰 옷을 사오시었다
내 몸이 자랄 것을 예상하시었다
벚꽃이 두 번 피어도 옷 속에서 헛돌던 내 몸을 바라보는 엄마는
얼마나 헐렁했을까
접힌 바지는 접힌 채 낡아갔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 이름을 먼저 지으시었다
내가 자랄 것을 예상하여
큰 이름을 지으시었다
바람의 심장을 찾아 바람 깊이 손을 넣는 사람의 이름
천 개의 보름달이 떠도
이름 속에서 헛도는 내 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서
까마귀가 날아갔다
내 이름은 내가 죽을 때 지어주시면 좋았을 걸요
이름대로 살기보다 산 대로 이름을 갖고 싶어요
내 이름값으로 맥주를 드시지 그랬어요
나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걸요
아무리 손을 뻗어도 손이 소매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걸요
이름을 한 번 두 번 접어도 발에 밟혀 넘어지는 걸요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이불처럼 이름이 있다
하루 종일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는 날 저녁이면 나는
이름을 덮고 잠을 잔다
뒤척이며 이름은 나를 끌어안고 나는 이름을 끌어안는다
잠에 지친 오전
새의 지저귐이 몸의 틈이란 틈에 박혔을 때,
이름이 너무 무거워 일어날 수 없을 때,
나는 내 이름을 부른다
제발 나 좀 일어나자
―시집 『어쩌면 너는 시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일지도』 2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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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배 / 충북 부여 출생. 2019년 〈영남일보 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어쩌면 너는 시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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