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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인의 시, 그리고
시간의 연대 (외 2편) 강영은 돌 위에 돌을 얹고 그 위에 또 돌을 얹어 궁극으로 치닫는 마음 마음 위에 마음을 얹고 그 위에 또 마음을 얹어 허공으로 치솟는 몸 돌탑은 알고 있었다. 한 발 두 발 디딜 때마다 무너질 걸 알고 있었다. 무너질까 두근거리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므로 조그만 돌멩이를 주워 마음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태어나기 전의 돌탑을 태어난 이후에도 기다렸다. 한곳에 머물러 오래 기다렸다. 돌멩이가 자랄 때까지 돌탑이 될 때까지 너머의 새 새가 날아가는 하늘을 해 뜨는 곳과 해 지는 곳으로 나눕니다. 방향이 틀리면 북쪽과 남쪽을 강조하거나 죽음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나의 흉곽을 새장으로 설득하기도 합니다. 사이에 있는 것은 허공 새가..
가려움 이근화 머리가 가려운 것은 머리카락 때문이 아니다 머리카락을 잘라도 남는 가려움 머리를 밀어도 남는 가려움에 대한 생각들 그건 당신이 없어야 당신이 그리운 것과 마찬가지일까 옆에 있는 사람을 끝없이 그리워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머리를 긁으며 그리움의 전문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배관을 손보는 사람의 전문성은 어떤가 비행기를 조종하다 양파를 절이는 사람의 전문성은 어떤가 인생 전환의 시점에서 플러스마이너스를 따지지 않는 말 못할 가려움 가려움의 마을에서 가려움의 집을 짓고 가려움의 난로를 피우고 가려움의 허기를 지핀다 말 못 할 곳이 가렵고 너의 오만과 허세가 가렵고 나의 두려움과 떨림이 온통 가렵다 어느 순간 가렵지 않게 되었을 때 웃음이 날지 울음이 날지 그건 모르는 일..
슬프지도 않은 노래의 후렴에 (외 1편) 이종섶 자신을 잊기 위해 굼벵이처럼 기어온 길을 되돌아가 유리를 깨고 초침까지 꺼내 낯선 기억을 정지시키는 얼굴 없는 형체가 힘없이 악수도 할 줄 모르는 손에 붙잡혀 속절없이 끌려가는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고 울며울며 애원하던 날들 시장 바닥에 깔린 좌판대에서 싸구려 빗처럼 휘어지고 마지막 버스에서 뜬 눈으로 새우잠을 자며 깃털이 뽑힌 새들의 날개를 매단다 지붕 위로 불어대는 이빨 없는 바람의 시린 손 잊으면 잊혀진다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상처의 파장이 어제를 용서하기 위해 멈춰 줄지 모른다 무심하게 굴러가다 애매한 경계에 서서 응시하는 눈동자들 감은 눈동자들 냉장고 시한부 인생들을 저장하고 나면 하나둘 아일랜드*로 떠나간다 햇빛을 보는 순간 자신을 선택한 사람..
더 멀고 외로운 리타 (외 2편) 이장욱 만나러 와주어요. 여기가 북극이라서 여행이라도 하듯이 여기가 적도라서 탐험이라도 하듯이 매일 장례식이 열려요. 국가정책에 대한 토론회가 개최되었대. 우울증이 있음. 이어폰을 귓속 깊숙이 밀어 넣고 집에 갔다. 집을 나왔다. 집에 갔다. 조금 더 먼 곳에는 북극의 펭귄과 날지 않는 새들 내 귓속에 내리는 겨울비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음악과 바이러스 하지만 이봐요, 펭귄은 북극이 아니라 남극에 산다고. 바이러스는 혈관이 아니라…… 당신의 가까운 생물이 사라졌어요. 당신의 먼 사람이 앓고 있어요. 어제는 외로웠던 누군가가 내일은 지상에 없고 집을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오지 않았다. 사라진 리타가 시를 읽네, 북극에서 수유리에서 내 귓속에서 여행자가..
윙크 (외 2편) 권혁웅 눈꺼풀은 몸이 우리에게 선물한 이불이죠 그것도 두 장이나 그가 이불 한 장을 뺏어 갔어요 오늘 밤 나는 편히 자기는 틀렸어요 동물의 왕국 ―동물계 소파과 의자속 남자 사람 소가 트림의 왕이자 이산화탄소 발생기라면 이 동물은 방귀의 왕이자 암모니아 발생기입니다 넓은 거실에 서식하면서 소파로 위장하고 있죠 중추신경은 리모컨을 거쳐 TV에 가늘게 이어져 있습니다 배꼽에 땅콩을 모아두고 하나씩 까먹는 습성이 있는데 이렇게 위장하고 있다가 늦은 밤이 되면 진짜 먹잇감을 찾아 나섭니다 치맥이라고, 조류의 일종입니다 이 동물의 눈은 카멜레온처럼 서로 다른 곳을 볼 수 있죠 지금 프로야구와 프리미어리그를 번갈아 보며 유생 때 활발했던 손동작, 발동작을 회상하는 중입니다 본래 네발 동물이었으나 ..
햇빛을 보다 (외 1편) 문효치 지구 변두리 어느 소수 민족 그들 축제의 제물이 된 물소의 뿔 끝에 반짝 해가 와서 내려앉는다 저 햇빛의 황홀 뿔의 밑동으로 정액처럼 흘러내리는 햇빛 죽음의 뿔 위에서 신은 지금 교접 중이다 그동안 신은 외로웠나 보다 바람은 풀숲에 들어 잠자고 있는데 지금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줄 4 비틀거리다 넘어진다 줄에 걸린 것이다 세상에 널려 있는 줄 눈을 크게 뜨고 건너뛰어야 ᄒᆞᆫ다 줄은 촘촘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바람 같은 건 거침없이 빠져나간다 그렇다 정신 바짝 차리고 바람이 되어야 한다 바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시집 『헤이, 막걸리』 2023.12 --------------------- 문효치 / 1943년 전북 군산 출생. 1966년 한국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