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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멀고 외로운 리타 (외 2편) / 이장욱 본문

[ 좋은시 읽기]

더 멀고 외로운 리타 (외 2편) / 이장욱

박숙인 2024. 3. 24. 15:45
더 멀고 외로운 리타 (외 2편)


   이장욱
 
  
만나러 와주어요.
여기가 북극이라서 여행이라도 하듯이
여기가 적도라서 탐험이라도 하듯이
 
매일 장례식이 열려요국가정책에 대한 토론회가 개최되었대우울증이 있음이어폰을 귓속 깊숙이 밀어 넣고
 
집에 갔다.
집을 나왔다.
집에 갔다.
 
조금 더 먼 곳에는 북극의 펭귄과
날지 않는 새들
내 귓속에 내리는 겨울비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음악과
바이러스
 
하지만 이봐요,
펭귄은 북극이 아니라 남극에 산다고.
바이러스는 혈관이 아니라……
 
당신의 가까운 생물이 사라졌어요.
당신의 먼 사람이 앓고 있어요.
어제는 외로웠던 누군가가
내일은 지상에 없고
 
집을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오지 않았다.
 
사라진 리타가 시를 읽네북극에서
수유리에서
내 귓속에서
 
여행자가 실종되었다는군열대야가 다가오고 있어요빙하기가 시작되었다코인이 급등했대다 집어치워!
 
만나러 와주어요여기가 불가능한 곳이라도
만나러 와주어요나의 먼 꿈속으로
북극에 내리는 뜨거운 비
열대우림에 쏟아지는 폭설
이곳에서 새들은 헤엄치고
펭귄은 날아다니죠.
 
좀 조용히 해줄래?
음악이 안 들려.
내 귓속에서 자꾸 중얼거리는 리타 때문에
저기 저 빗속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더 멀고 외로운 리타 때문에
 
 
 
왼손에 돌멩이
 
 
마술을 보여줄까?
골라보렴,
오른쪽 주먹과 왼쪽 주먹 중에서
이 상자와 저 상자 가운데서
 
오른쪽 주먹을 펼치면 꽃들이 피어오른다.
일생을 화사하게 덮어버리지.
하지만 왼손에는 차가운 돌멩이
외로움조차 사라진 마음
 
빗소리 수많은 각자의 시간들이 떨어지는
빗소리
 
나는 검고 커다란 망토를 휙!
펼쳐서 너를 가리네너를 덮어버리네.
밤의 망토 속에서 너는 문득 생명을 얻고
점점 더 생생해지고 마침내
생활을
 
나는 경쾌한 리듬에 맞춰 무대 앞으로
전 세계의 관람객들 앞에서 탭댄스를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우아한 포즈로 만주 벌판의 역사를 바꾸고
십 년 전의 빗소리를 바꾸고 마침내
어젯밤의 굳은 결심을 바꾸었네.
 
아아하지만 모든 것은 망토 속에 있었다.
빨간 구두가 혼자 춤을 추는 아홉 살
먼 나라의 수평선을 표류하는 열아홉 살
스물아홉에서 쉰아홉의 변치 않는 사람까지
오늘은 마법에 가까운
아흔둘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망토를 휙!
걷어내자,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허공
누구든 처음부터 알고 있던 바로 그것
하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자,
네가 사라졌다!!!
 
여러분이것은 마술이 아니다.
망토 속에는 허공이 아니라
빗소리
수많은 각자의 시간들이 떨어지는 빗소리
 
그리고 나의 아름다운
왼손에 돌멩이
 
 
 
극적인 삶
 




막이 내려올 때는 조용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후의 해변이나
노인의 뒷모습 또는
혼자 깨어난 새벽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말의 눈을 찌르는 소년이었다.
요한의 목을 원하는 살로메였고
숲을 헤매는 빨치산이었다.
세일즈맨이 되어 핀 조명이 떨어지는 무대에서
독백을


여러분인생에는 기승전결이 없다.
코가 큰 시라노는 여전히 편지를 쓰고
빨간 모자를 쓴 늑대는 밤마다 문을 두드리고
맥베스는 예언에 따라 죽어가는 것


추억에 잠겨 혁명을 회고하는 자들은 이미
혁명의 적이 된 자들이지.


겨울 다음에는 가을이 오고 가을 다음에는
영구 미제 살인 사건이 시작된다.


우리는 결국 바냐 아저씨처럼 쓸쓸할 거예요.
고도를 기다리며 영원히
벌판을 떠돌겠지요.
자책하는 햄릿과 함께


드라마틱한 삶이란 출장 일과 두 시간짜리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인데
카라마조프는 검은 피와 택하신 자들이라는 뜻인데
인형의 집에서는 드디어 노라가 뛰쳐나오고
에쿠우스의 주인공은 자신의 눈을 찌르며 외친다.
머리가 열 개인 말들이여눈이 백 개인 말들이여반인반마의 신들이여!


붉은 막이 등 뒤로 내려오자
나는 배꼽에 두 손을 모으고 깊이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객석의 어둠 속에서 모자를 깊이 눌러쓴 살인자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집 음악집』 2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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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음악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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