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슬프지도 않은 노래의 후렴에(외 1편) / 이종섶 본문
슬프지도 않은 노래의 후렴에 (외 1편)
이종섶
자신을 잊기 위해
굼벵이처럼 기어온 길을 되돌아가
유리를 깨고 초침까지 꺼내
낯선 기억을 정지시키는
얼굴 없는 형체가 힘없이
악수도 할 줄 모르는 손에 붙잡혀
속절없이 끌려가는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고
울며울며 애원하던 날들
시장 바닥에 깔린 좌판대에서
싸구려 빗처럼 휘어지고
마지막 버스에서
뜬 눈으로 새우잠을 자며
깃털이 뽑힌 새들의 날개를 매단다
지붕 위로 불어대는 이빨 없는 바람의
시린 손
잊으면 잊혀진다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상처의 파장이
어제를 용서하기 위해 멈춰 줄지 모른다
무심하게 굴러가다
애매한 경계에 서서 응시하는 눈동자들
감은 눈동자들
냉장고
시한부 인생들을
저장하고 나면
하나둘 아일랜드*로 떠나간다
햇빛을 보는 순간
자신을 선택한 사람을 위해 바쳐지는 목숨들
영혼은 흡수당하고
육체만 배설된다
*인간 복제를 다룬 영화.
―시집 『우리는 우리』 2024.3
-----------------------
이종섶 / 경남 하동 출생.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6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 『물결무늬 손뼈 화석』 『바람의 구문론』 『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 『우리는 우리』.
'[ 좋은시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의 연대 (외 2편) / 강영은 (0) | 2024.03.24 |
---|---|
가려움 / 이근화 (0) | 2024.03.24 |
더 멀고 외로운 리타 (외 2편) / 이장욱 (0) | 2024.03.24 |
윙크 (외 2편) / 권혁웅 (0) | 2024.03.24 |
햇빛을 보다 (외 1편) / 문효치 (0) | 2024.03.24 |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