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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도 않은 노래의 후렴에(외 1편) / 이종섶 본문

[ 좋은시 읽기]

슬프지도 않은 노래의 후렴에(외 1편) / 이종섶

박숙인 2024. 3. 24. 15:46

슬프지도 않은 노래의 후렴에 (외 1편)

 

   이종섶

 

자신을 잊기 위해

굼벵이처럼 기어온 길을 되돌아가

유리를 깨고 초침까지 꺼내

낯선 기억을 정지시키는

 

얼굴 없는 형체가 힘없이

악수도 할 줄 모르는 손에 붙잡혀

속절없이 끌려가는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고

울며울며 애원하던 날들

시장 바닥에 깔린 좌판대에서

싸구려 빗처럼 휘어지고

 

마지막 버스에서

뜬 눈으로 새우잠을 자며

깃털이 뽑힌 새들의 날개를 매단다

 

지붕 위로 불어대는 이빨 없는 바람의

시린 손

 

잊으면 잊혀진다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상처의 파장이

어제를 용서하기 위해 멈춰 줄지 모른다

 

무심하게 굴러가다

애매한 경계에 서서 응시하는 눈동자들

감은 눈동자들

 

 

 

냉장고

 

 

 

시한부 인생들을

저장하고 나면

하나둘 아일랜드*로 떠나간다

 

햇빛을 보는 순간

자신을 선택한 사람을 위해 바쳐지는 목숨들

 

영혼은 흡수당하고

육체만 배설된다

 

*인간 복제를 다룬 영화.

 

 

             ―시집 우리는 우리 2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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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 / 경남 하동 출생. 2008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6 광남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 물결무늬 손뼈 화석』 『바람의 구문론』 『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 『우리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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