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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인의 시, 그리고
김해자의 「꽃잎 세탁소」 감상 / 박소란 꽃잎 세탁소 김해자 꽃양귀비 붉은 꽃잎 위에 청개구리가 엎드려 있어서 나도 납작 엎드려 뭐 하나 들여다봤더니, 제 목울대로 꽃의 주름을 펴는 게 아닌가, 그 호박씨만한 것이 앞발 뒷발로 붉은 천 꽉 부여잡고 꽈리 풍선 불어가며 다림질하는 동안 내 마음도 꽃수건처럼 펴지고 있었다 개망초 하얀 꽃잎 위에 나비가 날개를 접고 있어서 나도 땅두릅 그늘 아래서 올려다봤더니, 계란 노른자 같은 꽃술을 빨아대는 게 아닌가, 그 상추씨만한 입으로 꽃잎을 빠는 동안 하얀 베갯잇 같은 구름이 간지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하늘이 갓 세수한 듯 말개지고 있었다 .........................................................................
문성해의 「결이라는 말」 감상 / 박준 결이라는 말 문성해 결이라는 말은 살짝 묻어 있다는 말 덧칠되어 있다는 말 살결 밤결 물결은 살이 밤이 물이 살짝 곁을 내주었단 말 와서 앉았다 가도 된단 말 그리하여 나는 살에도 밤에도 물에도 스밀 수 있단 말 쭈뼛거리는 내게 방석을 내주는 말 결을 가진 말들은 고여 있기보단 어딘가로 흐르는 중이고 씨앗을 심어도 될 만큼 그 말 속에 진종일 물기를 머금는 말 바람결 잠결 꿈결이 모두모두 그러한 말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 2012 ........................................................................................................................... 종이는 저마..
어떤 그림 이병률 미술관 두 사람은 각자 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사람들에게 그림은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만지고 쓰다듬는 일이 중요하단 걸 알았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합의 하에 새로 정한 임무처럼 항상 방을 나란히 옮겨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림 안에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 무수한 공간을..
분갈이 김미정 새들이 창을 통과해서 날아다녔다 안과 바깥이 동시에 구멍이 났다 모르는 사람들이 가끔 내 꿈과 내통했다 뿌리 없는 화초들이 모여들어 거리엔 소문만 가득하고 멀어진 풍경을 잡기엔 내가 너무 무성해 침묵이 자라 벽을 타고 올라도 할 수 없지 위태로운 방식으로 화분에 물을 준다 음 소거된 목소리가 바닥을 뚫고 자라는데 화분이 터져 나가라 커질까 날마다 돋아나는 얼굴들 검은 페이지를 펼치고 뛰어내리고 거실에 웅크린 구석에서 화분들이 아팠다 넓은 들판은 아무 소용 없었다 추운 새들이 꿈속으로 숨어들었다 날개 꺾인 새들이 자란다 잎들은 조금씩 새를 닮아가고 있었다 새가 되지 못했다 나는 내 바깥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시전문지 《아토포스》 2023년 겨울호 -----------------------..
눈이 굳어지기 전에 이수명 눈과 눈 사이를 나는 걷는다. 눈과 집 사이를 나는 걷는다. 검은 코트를 입고 걷는다. 검은 캐리어 검은 신발 흰 눈을 따라 걷는다. 눈 덮인 도로를 걷는다. 바닥을 보며 걷는다. 눈이 굳어지기 전에 눈으로 마을이 다 굳어지기 전에 탑승을 해야 하는데 몇 번 게이트인지 확인해야 하는데 나는 걸어만 간다. 계속 걸어서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다. 신호등 불이 깜빡거린다. 통증이 굳어지기 전에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는데 눈에서 나가지 못한다. 눈 같은 것을 뭉쳐버리지 못하며 뭉쳐서 멀리 던지지도 않는다. 검은 코트 안으로 검은 신발 안으로 지꾸 눈이 들어온다. 나는 눈에 젖는다. 발목을 가져왔지만 창에서 뛰어내릴 때 삐끗한 발목 눈에 흠뻑 젖고 만다. 비행기를 놓..
나의 발가락은 서로 미워하지 않도록 태어났습니다 심재휘 좁고 냄새나는 신발 속에서도 나의 발가락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도록 태어났습니다 사랑을 잃고 시끄러웠던 철다리 밑을 가로질러 올 때에 나의 고요한 발가락들은 서로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발톱이 아무렇게나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고 강 하구에 이르도록 너무 오래 걸었습니다 삼월의 발톱이 사월의 발가락을 찔러 날리던 벚꽃에 피를 묻힐 줄을 몰랐습니다 땅 끝에 이르는 그 긴 길을 절룩거리며 걸어갈 줄은 나는 애초에 몰랐습니다 —계간 《가히》 2024년 봄호 ----------------------- 심재휘 / 1963년 강원 강릉에서 출생.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안마사』 『용..
낮 동안의 일 (외 2편) 남길순 오이 농사를 짓는 동호 씨가 날마다 문학관을 찾아온다 어떤 날은 한 아름 백오이를 따 와서 상큼한 오이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놓고 간다 문학관은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다 햇볕이 나고 따뜻해지면 오이 자라는 속도가 두 배 세 배 빨라지고 화색이 도는 동호 씨는 더 많은 오이를 딴다 문학관은 빈손이라 해가 바뀌어도 더 줄 것이 없고 문학을 쓸고 문학을 닦고 저만치 동호 씨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갈대들 길 양쪽으로 비켜나는데 오늘은 검은 소나기를 몰고 온다 문학관을 찾은 사람들이 멍하니 서서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다 지붕 아래 있어도 우리는 젖는다 한밤의 트램펄린 튀어 오르는 자의 기쁨을 알 것 같다 뛰어내리는 자의 고뇌를 알 것도 같다 트램펄린..
완연히 붉다 김명리 일몰 무렵 천변의 마구잡이 뒤엉킨 풀숲 가에 작은 고양이 한 마리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 아가야 부르며 다가가니 활시위마냥 등뼈를 곧추세우며 빤히 나를 쳐다보는데 아아, 한쪽 눈 움푹 팬 눈구멍 속의 눈자위가 없다! 눈동자가 없다! 이렇게나 투명한 붉은 빛을 보았나 움푹 팬 눈구멍 속으로 거대한 일몰이 들어가 앉았다 눈물자국 대신 묵시록을 접힌 데 없는 광대무변을 꽃피웠다 완연히 붉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4년 1-2월호 ------------------- 김명리 / 1959년 대구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시집 『물속의 아틀라스』 『물보다 낮은 집』 『적멸의 즐거움』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제비꽃 꽃잎 속』 『바람 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