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4/04/12 (15)
박숙인의 시, 그리고
정현종의 「오 따뜻함이여」 감상 / 문태준 오 따뜻함이여 정현종(1939~ ) 군밤 한 봉지를 사서 가방에 넣어 버스를 타고 무릎 위에 놨는데,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갓 구운 군밤의 온기 ⸺ 순간 나는 마냥 행복해진다. 태양과 집과 화로와 정다움과 품과 그리고 나그네 길과…… 오, 모든 따뜻함이여 행복의 원천이여. ...................................................................................................................................................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큰눈이 오고 수은주가 영하로 뚝 떨어질 때 세상은 눈덩이와 얼음 속에 갇힌 듯해도 우리는 온기를 아주 잃지는..
이대흠의 「목련」 감상 / 나민애 목련 이대흠(1967~ )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
손택수의 「시집의 쓸모」 감상 / 박준 시집의 쓸모 손택수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느냐며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차마 말은 못하고 건성으로 수저질을 하다가 (책을 발로 밀어 슬쩍 빼면 지진이라도 난 듯 덜컥 식탁이 내려앉겠지 국그릇이 철렁 엎질러져서 행주를 들고 수선을 피우겠지) 고소한 복수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이사를 다니느라 다치고 긁히고 깨진 식탁 각을 잃고 둥그스름해진 모가 보인다 시집이 이토록 쓸모도 있구나 책꽂이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보단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서 국그릇 넘치지 않게 평형을 잡아주는, 오래전에 잊힌 시집 이제는 ..
강인한의 「갚아야 할 꿈」 감상 / 최형심 갚아야 할 꿈 강인한 자정의 비는 가로등이 하얗게 빛나는 곳으로 몰려간다. 멈칫멈칫 내린다. 거기 있을 것이다. 느릅나무 이파리 뒤에 숨어 우는 민달팽이 푸른 울음, 기다란 한 줄이. 내밀어 더듬는 뿔에 당신의 붉은 꿈이 걸린다. 엎치락뒤치락 갚아야 할 당신의 꿈이. ......................................................................................................................................................................................... 전쟁이나 경제위기가 닥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이들은 언제나 그 사..
김지녀의 「모딜리아니의 화첩」 감상 / 송재학 모딜리아니의 화첩 김지녀 목이 계속 자란다면 액자의 바깥을 볼 수 있겠지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에서 얼굴과 얼굴과 얼굴의 간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무너질 수 있겠지 붉은 흙더미처럼 나의 얼굴이 긴 목 위에서 빗물에 쓸려나가네 꼿꼿하게 앉아서 갸우뚱하게 ―시집 『양들의 사회학』 2014.4 ............................................................................................................................................................... 모딜리아니의 긴 목이 아름답다고 말할..
황규관의 「길」 감상 / 박준 길/ 황규관 가자고 간 건 아니었지만 간 자리마다 허무 가득한 심연이다 떠나자고 떠난 건 아니었지만 두고 온 자리마다 가시덤불 무성한 통곡이다 지금껏 품은 뜻은 내 것이 아니었고 꾸었던 꿈도 내 소유가 아니었는데 지나온 길 위에 남긴 흔적에 왜 가슴은 식을 줄 모르는가 멈추자 해도 가야 하고 머물자 해도 떠나야 하는데 왜 설렘이고 번민인가 바람이고 생명인가 —시집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2011 .......................................................................................................................... 조금씩 이상한 느낌이 엄습했습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
줄장미가 피어나는 생각 (외 2편) / 동시영 여자가 “밥보다 마음을 더 잘 먹어야 한다”고 말하자 남자가 “마음보다 밥을 더 잘 먹어야 한다” 말한다 모르는 ‘나’를 따라가다 키 큰, ‘습관’ 따라 시장엘 간다 제철 없는, 물건들 사고파는 시장 속 팔리지 않는 신新풍속이 제철처럼 싱싱하다 ‘껍질’이 몸에 어울리는 옷을 오래 골라 사자 ‘알맹이’도 맘에 어울리는 옷을 한 벌 산다 밤이 어둔 방에 불 켤 스위치를 사자 낮이 어둔 맘에 불 켤 스위치를 산다 카페가 내게 다가오자 ‘슬픔’과 ‘기쁨’이, 누굴 만날 거냐? 앞다퉈 묻는다 ‘빈 칸의 카니발’을 혼자 팔고 혼자 사고 가끔은 나쁜 생각에 팔려나간다 ‘버르장머리미장원’ 앞 버릇없이 막자란 줄장미가 사람들 생각을 찌르다 놓다, 장난치고 있다 수평선은 물에..
시 / 박정대 촛불을 켜고 바람의 모습을 본다 쌀랑쌀랑 바람이 불었다 세상을 끄고 조용히 누워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발의 숫자를 헤아렸다 간혹 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었다 잠의 안팎에서 바람은 촛불의 허리를 흔들었다 멀리 있는 것들은 멀리 있어서 다행스럽게 빛났다 가까이 있는 생활은 추웠으나 촛불 한 자루로 이 겨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감자 몇 알과 담배가 여전히 남아 있으니 밤새 싸락눈은 내려와 어둠을 덮어 가느니 아침이 오면 이팝나무 위로도 눈꽃 가득 피어나겠다 쌀랑쌀랑 바람이 분다 아직 잠들지 않은 새벽의 이마 위로도 눈은 내린다 —웹진 《공정한시인들의사회》 2024년 4월호 ---------------------- 박정대 / 1965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