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좋은시 읽기] (220)
박숙인의 시, 그리고
시 / 박정대 촛불을 켜고 바람의 모습을 본다 쌀랑쌀랑 바람이 불었다 세상을 끄고 조용히 누워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발의 숫자를 헤아렸다 간혹 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었다 잠의 안팎에서 바람은 촛불의 허리를 흔들었다 멀리 있는 것들은 멀리 있어서 다행스럽게 빛났다 가까이 있는 생활은 추웠으나 촛불 한 자루로 이 겨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감자 몇 알과 담배가 여전히 남아 있으니 밤새 싸락눈은 내려와 어둠을 덮어 가느니 아침이 오면 이팝나무 위로도 눈꽃 가득 피어나겠다 쌀랑쌀랑 바람이 분다 아직 잠들지 않은 새벽의 이마 위로도 눈은 내린다 —웹진 《공정한시인들의사회》 2024년 4월호 ---------------------- 박정대 / 1965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
꿈속에서 우는 사람 (외 2편) 장석주 어딘지 모를 곳에서 겨울엔 눈 많은 파주로 넘어와서 꿈속의 꿈에서 홀로 울다가 눈사람 몇 개를 만들다 떠나겠지. 지난여름 장마에 맹꽁이가 울 때 시장통에서 사 온 편육을 먹고 고요한 음악에 귀를 쫑긋 세우면 고양이들은 구석에 몸을 숨기고 비탄과 유머도 모르는 채 졸고 있겠지. 피로가 몰려오는 저녁 사랑은 우리의 쓸쓸한 관습, 우리는 등을 켠 거실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눈 키스를 하다가 잠이 들겠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나, 우리는 파주에 산 적이 없는 이들에게 추억을 리본처럼 매달아주는 저녁들, 식탁에는 귀신들도 와서 밥을 먹겠지. 한밤중 늑골 아래서 누군가 말을 거는데 그건 귀신의 말, 알 수 없는 외계인의 말, 겨울마다 눈이 참 많이도 내렸지. 파주에서 인사..
매일밤 우리가 해왔던 노동 김소연 우리는 눈사람처럼 녹아내리는 연습을 했습니다 녹지 않을 가능성을 희망한 적도 있었으나 그런 희망은 아주 잠시 스쳐갈 뿐 녹을 때를 기다리며 연습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환한 정류장에 세워둡니다 8차선 도로 한가운데에 세워두어도 상관없지만 세워두든 눕혀놓든 큰 차이는 없지만 우리는 죽은 해파리처럼 해변에서 나뒹구는 훈련을 했습니다 투명해서 미끌거려서 부서져서 이게 뭐야? 신발 코나 작대기로 누군가 툭툭 치다가 이내 돌아서도 기억에 남을 리가 없는 것 죽은 참새처럼 누군가 손바닥에 담아가 자그마한 무덤을 만들어 줄 리도 없는 것 우리는 심해를 누비느라 좀 쉬고 싶다는 듯이 휴식과도 같은 훈련을 해보았습니다 겨울을 견디는 나무들도 흉내내보았나요? 여름을 즐기는 때와는 다른 ..
양말 (외 1편) 서진배 거 봐라 네가 가진 자루가 작더라도 왼쪽 오른쪽 나누어 담으면 너를 다 담을 수 있잖니, 너를 붙잡을 곳 마땅치 않아 들고 걸어가기 어려울 때는 너를 자루에 담아 들고 걸어가면 한결 편할 거야 방으로 드는 식당에서 너를 구멍 난 자루에 담아 왔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너는 그 구멍으로 줄줄 새는 너를 들키고 싶지 않아 발을 숨겨야 할 거야 자루를 아무리 당겨 올려도 자루는 내 무릎도 담지 못할 뿐인데요 네 발만 담아도 너를 자루에 담는 거란다 황금색 계급장을 찬 어깨 앞에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는 것만으로도 떨고 있는 너를 감출 수 있거든, 쓰레기봉투에 너를 조금이라도 더 담으려 발을 넣고 밟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야 유리 거울처럼 깨진 너의 얼굴 조각들이 그 안에 담겨 ..
사라진 사람들은 부엌에 모여 산다 권현형 고요가 유리그릇에 담겨 정교하게 부서진다 사라진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곳은 부엌, 명절 가까운 10월엔 사람보다 구름이 살아 있다 빈집 부엌에서 이십 년 전에 들었던 탄식과 웃음소리를 뭉게구름의 중얼거림처럼 듣는다 향연이 끝나고 외할머니와 이모와 외삼촌이 차례대로 사라졌다 사라진 사람들은 부엌에 모여 사나? 오래된 냄비와 사발을 씻을 때마다 고요가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곤 한다 낡은 싱크대에 붙어 있는 라디오를 통해 엘피판으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운 좋게 만나기도 하나 모계의 혈관을 타고 사람 소리가 먼 곳에서 흘러온다 몸은 사라져도 소리가 남는다 홀로 있는 사람은 쇳덩어리 돌덩어리와도 교감한다 홀로 있던 외할머니는 거실 유리창으로 내다보며 수많은 자동차와 바퀴와 ..
햇빛을 보다 (외 1편) 문효치 지구 변두리 어느 소수 민족 그들 축제의 제물이 된 물소의 뿔 끝에 반짝 해가 와서 내려앉는다 저 햇빛의 황홀 뿔의 밑동으로 정액처럼 흘러내리는 햇빛 죽음의 뿔 위에서 신은 지금 교접 중이다 그동안 신은 외로웠나 보다 바람은 풀숲에 들어 잠자고 있는데 지금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줄 4 비틀거리다 넘어진다 줄에 걸린 것이다 세상에 널려 있는 줄 눈을 크게 뜨고 건너뛰어야 ᄒᆞᆫ다 줄은 촘촘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바람 같은 건 거침없이 빠져나간다 그렇다 정신 바짝 차리고 바람이 되어야 한다 바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시집 『헤이, 막걸리』 2023.12 --------------------- 문효치 / 1943년 전북 군산 출생. 1966년 한국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모든 풍경에는 바람이 있다 김광기 바람이 분다. 낮이나 밤이나 부는 바람, 바람 속에는 풍경이 있고, 풍경이라는 말에는 바람의 볕, 바람의 그림자가 숨어 있다. 바람 곁에도 있고 그 뒤에도 있는 가십거리로 전달되며 알코올 중독자로 찍힌 그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 요양원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마누라가 좀 들어가 있어 달래. 근데 어쩌면 좋으니,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뇌경색 네 번이면 다들 죽는다는데 다섯 번을 맞고도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눈도 잘 보이지 않고 걷지도 못하고 왜 죽지는 않는지, 사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그의 어눌한 말투를 들으며 그래도 사는 것에 적응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우물쭈물 전화를 끊는다. 시를 쓰기 위해 먹기 시작했다는 술이 그를 먹어치우고..
소리 나지 않는 글 추프랑카 아름다운 국어책을 무척 사랑했지만 2학년이 되도록 글을 읽지 못했다 교실 뒤에서 무릎 꿇고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창문을 닦고 변소 청소를 했다 소리 나지 않는 나의 글 언니들은 큰소리로 나, 너, 우리…… 교과서를 읽고 또 읽었다 어머니, 아버지…… 날마다 아버지를 먹었다 허수는 먹고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허수를 먹고 허수 속에 웅크린 낱말, 아버지 선생님은 내게 읽기를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모든 낱말들이 아버지란 발음에 잡아먹히는 줄 까맣게 몰랐던 나의 선생님 엄마는 무논 벼 베기를 미루고 숯다리미에 숯불을 담아 한복을 다려 입고 떡 한 시루를 쪄 교무실로 이고 왔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나는 착하신 선생님과 착하신 엄마를 하루 종일 입 안에 넣고 굴렸다 아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