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좋은시 읽기] (220)
박숙인의 시, 그리고
나의 발가락은 서로 미워하지 않도록 태어났습니다 심재휘 좁고 냄새나는 신발 속에서도 나의 발가락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도록 태어났습니다 사랑을 잃고 시끄러웠던 철다리 밑을 가로질러 올 때에 나의 고요한 발가락들은 서로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발톱이 아무렇게나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고 강 하구에 이르도록 너무 오래 걸었습니다 삼월의 발톱이 사월의 발가락을 찔러 날리던 벚꽃에 피를 묻힐 줄을 몰랐습니다 땅 끝에 이르는 그 긴 길을 절룩거리며 걸어갈 줄은 나는 애초에 몰랐습니다 —계간 《가히》 2024년 봄호 ----------------------- 심재휘 / 1963년 강원 강릉에서 출생.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안마사』 『용..
낮 동안의 일 (외 2편) 남길순 오이 농사를 짓는 동호 씨가 날마다 문학관을 찾아온다 어떤 날은 한 아름 백오이를 따 와서 상큼한 오이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놓고 간다 문학관은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다 햇볕이 나고 따뜻해지면 오이 자라는 속도가 두 배 세 배 빨라지고 화색이 도는 동호 씨는 더 많은 오이를 딴다 문학관은 빈손이라 해가 바뀌어도 더 줄 것이 없고 문학을 쓸고 문학을 닦고 저만치 동호 씨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갈대들 길 양쪽으로 비켜나는데 오늘은 검은 소나기를 몰고 온다 문학관을 찾은 사람들이 멍하니 서서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다 지붕 아래 있어도 우리는 젖는다 한밤의 트램펄린 튀어 오르는 자의 기쁨을 알 것 같다 뛰어내리는 자의 고뇌를 알 것도 같다 트램펄린..
완연히 붉다 김명리 일몰 무렵 천변의 마구잡이 뒤엉킨 풀숲 가에 작은 고양이 한 마리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 아가야 부르며 다가가니 활시위마냥 등뼈를 곧추세우며 빤히 나를 쳐다보는데 아아, 한쪽 눈 움푹 팬 눈구멍 속의 눈자위가 없다! 눈동자가 없다! 이렇게나 투명한 붉은 빛을 보았나 움푹 팬 눈구멍 속으로 거대한 일몰이 들어가 앉았다 눈물자국 대신 묵시록을 접힌 데 없는 광대무변을 꽃피웠다 완연히 붉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4년 1-2월호 ------------------- 김명리 / 1959년 대구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시집 『물속의 아틀라스』 『물보다 낮은 집』 『적멸의 즐거움』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제비꽃 꽃잎 속』 『바람 불고..
호박 이홍섭 아픈 몸 이끌고 찾아간 시골 약국 담벼락 아래 호박이 실하다 이 세상을 다 쌈 싸 먹어도 남을 것 같은 너른 호박잎이며 이 세상을 다 밝히고도 남을 것 같은 노란 호박꽃처럼 살지 못한 삶이 비루하다 호박처럼 펑퍼짐하게 살지 못한 삶이 애틋하다 어머니가 꾼 태몽이 들판에서 누런 호박 하나를 딴 것이라는데 내 불효의 넝쿨은 사방팔방으로 뻗어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격월간 《현대시학》2024년 1-2월호 ----------------------- 이홍섭 / 1990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 『강릉, 프라하, 함흥』 『숨결』 『가도가도 서쪽인 당신』 『터미널』 『검은 돌을 삼키다』.
사람정거장 진혜진 새벽 종소리로 물든 몸의 정거장에서 한 사람의 여름이 사라지고 있다 한 올만 툭 잡아당겨도 스스로 흩어져 버리는 환幻일지라도 더 이상 비뚤어지는 계절이 없을 때까지 서로의 목적지가 될 때까지 모든 결말을 끌어안았지만 푸르스름한 빛 속으로 사라지고 한 사람이 두고 간 시간이 그림자로 남아 지나가는 모든 발자국을 견딘다 어깨 너머의 꿈은 당신 밖으로 나오지 않은 연민이거나 멈추지 않고 지나간 연인의 이름이거나 의문이 많은 내일의 그림자 누구의 혀가 새벽의 체온을 더듬었을까 싱싱한 죄목들이 토해진 거리마다 팔딱거리는 그늘들 쓸만한 게 없어 함부로 던지는 눈빛을 밟고도 몰리는 무관심 사라지기 전 무엇을 하였는지 버려진 이름이 몇 개였는지 지켜봄이 사라질 때까지 당신을 통과해야 하는 것을 누구도..
봄이 와서 (외 2편) 함기석 청주 공단 화학 공장 앞 도로 따라 노조 플래카드들이 어깨 겯고 시위 중이다 갓길 걸으며 풀들도 꽃들도 푸른색 노란색 빨간색 리본 두르고 시위 중이고 벚나무 살구나무 이팝나무 손마다 하얀 피켓 들고 구호 외치며 시위 중인데 나중일 씨, 독한 화학약품 냄새에 절어 간장 속의 게처럼 오늘도 찍소리 한번 못 하고 시인 모든 꽃은 예언이다 불꽃들 다 지리라는 침묵이 활짝 꽃피자 모든 말이 시들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1 소개팅으로 시를 만나지 마라 불운이 너의 삶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거다 심심하다고 시를 술친구로 두지 마라 주사가 심해서 온갖 헛소리를 다 들어 줘야 할 거다 외롭다고 잘생긴 시를 남자친구로 두지 마라 더 외로워져서 혼자 죽을 거다 달빛 내리는 밤, 시가 들려주는..
어머님의 끝 강상기 산소마스크를 떼어냈다 순간, 어머님의 눈가에 맺히는 이슬 아직도 남은 어머님의 실개천 —계간 《시와세계》 2023년 겨울호 ---------------------- 강상기 / 1946년 전북 임실 출생.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2년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17년간 교직을 떠남. 시집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 『민박촌』 『와와 쏴쏴』 『콩의 변증법』 『조국 연가』 『고래사냥』 등, 산문집 『빗속에는 햇빛이 숨어 있다』 등.
당신의 손금을 보았네 (외 1편) 황형철 바닥을 보인다는 게 사방에서 꽂는 해적 룰렛의 칼 같아서 먼저 악수를 청하기 꺼리는 건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 숫자를 셀 때 새끼손가락부터 펴는 당신에게 괜히 핑계라도 걸어 볼 게 있나 싶은데 하나 둘 셋 천천히 드러나는 손금을 보고 있자니 지루한 슬픔을 노래하는 목소리와 한 박자 빠른 리듬으로 땡볕도 장마도 지나고 질문이 많은 눈과 입은 봄날 꽃잎 같아 사람은 평생에 몇 번 벚꽃을 볼까* 생의 개화기는 어디쯤 오고 있을까 모르는 사이 지나가 버렸을까 자꾸 먼 데로 향하는 시선 애써 돌리며 밖으로 뻗은 선을 살곰이 바라보는 것으로 빙하를 가르는 쇄빙선처럼 뜨거웠어 나는 *이바라기 노리코 시 「벚꽃」 중에서 바다 한 알 가무락조개 한 바구니 해감하자니 차르르 차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