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 본문

[ 이만섭 시인 ]

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

박숙인 2023. 2. 20. 15:24

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카프카/이만섭

 

엄밀한 의미에서 시란 쓰는 것 보다도 읽는 것이 더 어렵다 하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쓰는 것은 화자의 몫이고 읽는 것은 곧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남에 글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쉽지는 않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를 쓰고 또 시를 읽는다. 왜 그럴까.

시를 쓰는 화자나 시를 읽는 독자나 시가 우리의 삶에 필요한 한 부분임은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곧 탐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의미를 쫓아야 하고 독자는 부단히 시의 이해를 추구해야 하는것이 시의 성질이다. 바꾸어 말하면 행위의 과정에 역점을 두는 것이 문학을 하는 맛이다. 쉬운 시는 쉬운 시 대로 어려운 시는 어려운 시 대로 그 맛을 헤아리기에는 적당한 고충이 따른다. 시란 그많큼 폭넓은 은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읽어야 바람직한가.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부드러운 것은 입안에서 쉽사리 사라지지만 그렇지않은 고기같이 딱딱한 것은 이것을 오랬동안 씹음으로서 혀에서 오감을 찿는다. 시는 이같은 측면이 없지않다.

현대시에서 흔히 난해란 말을 하는데 시인이 내놓은 시가 어렵기 짝이 없어서 무슨 말인지조차 알아채지 못해서 난감하다는 얘길 곧잘 듣는다. 그것은 왜 그런가. 그럴 경우 읽고 또 읽다보면 고기의 맛처럼 진득함이 우러나올 수 있을 것인가. 시인만이 내간 닫힌 언어가 독자로 하여금 혼란스러울 때 그 시는 말 그대로 난해시라 할 것이다.

난해시는 우리의 천재 시인 "이상"이 그 원조격이라 하겠지만 서양에서는 소위 쉬르리얼리즘이란 사조로 귀결된지가 그 이전이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찿아서"라든지 "등대에"가 그 정통성을 보인다 하겠으나 초현실이란 사유속의 탈개념의 사유이다. 은유에서도 한참을 벗어난 초탈의 언어인 것이다. 따라서 시가 의도하지 않는 읽기가 되었을 때는 지극히 참담한 일이 아닐수 없다.

통계학에 데이터란 말을 자주 쓴다. 이는 어떤 전체적 변화의 수치를 정확히 찾아 기록함을 말함일 것이다. 시에 있어서도 바른 글읽기는 글의 주변을 꼼꼼히 살펴 이해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아래 시를 보자.

 

시제 1 호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 1의 아해가 두렵다고 그리오.

제 2의 아해도 두렵다고 그리오.

제 3의 아해도 두렵다고 그리오.

제 4의 아해도 두렵다고 그리오.

제 5의 아해도 두렵다고 그리오.

제 6의 아해도 두렵다고 그리오.

제 7의 아해도 두렵다고 그리오.

제 8의 아해도 두렵다고 그리오.

제 9의 아해도 두렵다고 그리오.

제10의 아해도 두렵다고 그리오.

 

제 11의 아해가 두렵다고 그리오.

제 12의 아해도 두렵다고 그리오.

제 13의 아해도 두렵다고 그리오.

13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사장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이상은 "이상"의오감도(烏瞰圖)의 전문이다. "이상"은 왜 이렇게 시를 썼을까. 누구나 처음 읽었을 때는 대뜸 이런 의문을 갖었을 것이다. 자기 혼자만 알아보고 말겠다는 것인가. 더러는 독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말인가. 이런 이유라면 애초에 이 시가 가치의 발견으로서 매김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은 여기서 왜 아해라고 했을까. 아해가 상징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13이라는 홀단위의 숫자는 어떤 개념일까 온갖 의문 투성이인 이 시는 우리에게 많은 물음을 갖게 한다.

오죽해야 당시에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를 하다가 빗발치는 비난의 화살을 받고 중단했을까 싶다.

결국 이 시는 자의식의 노래다. 보다 강한 욕구불만이 초현실의 기능으로 직조되고 있는 것이다. 아해가 이성이 있을 것인가. 아해가 이해타산에 억매일 것인가. 경직으로 풀고 있는 이 직관의 언어는 저항적이고 돌출적이자만 사실은 사회를 보는 시각을 밀도있게 반영한 것이다. 13인의 아해가 두렵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바꾸어 아해가 바로 두려운 것이다. 곧 비상구가 없는 사선에 놓인 자아의 한계상황을 그린것이 이 오감도라고 할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이 제창한 쉬르 리얼리즘이 왜 이상에게 기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는 그만의 시적 특질일 것이다. 이 시에서도 내면의 질곡과 허무가 그늘처럼 내려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런류의 시는 시대라는 주변 개념의 포괄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다름박질 하듯 열거된 아해가 어떤 의미에서는 공포의 모습이다. 이 잠재의식을 표현하려는 것이 이 시의 중요한 역활이다. 그렇기에 난해한 시일수록 시적 구성이 탄탄해야 할 것이다. 즉 논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때 시가 자칫 넋두리의 수준에 머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새여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의 산유화(山有花)란 시의 전문이다. 반면에 쉽게 읽히는 시를 생각 해본다. 쉽게 읽힌다고 혹여 시의 의미가 감소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독자가 시를 읽음에 있어서 반드시 유의해야 할 일은 쉬운 시에서 곧잘 감동을 놓치는 일이다. 흔히 시를 애송한다는 말을  한다. 이 애송이란 말은 친근하여 입버릇처럼 노래가 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이 얼마나 쉽고 읽기 편한 시인가. 민요풍에 정형을 담아 은율로 흐르는 시어는 다감하기조차 그지없다. 이처럼 주관적인 정서를 그려내는 시를 리리시즘이라고 한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를 노래하기에 감정을 진솔하게 들어낼 수 밖에 없다. 이 처럼 쉬운 시라도 의미를 전제로 할 때 뜻은 난해시에서 보여지는 이상으로 숨겨진 부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연에서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고 하는것이나 4연의 "갈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라는 말은 존재로서 풀 수 없는 초월의 개념이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저 혼자 피고 지는 들꽃, 외형적로 보면 계절을 노래한 듯 해도 이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주정적으로 인생을 노래한 시라 할 것이다.

산에서 살다가 산에서 피어 산에서 지는, 있음으로서의 존재가 그 다함을 은근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새로운 의미가 숨어 있다. 이렇듯 시란 감정을 은유에 대입시킨  언어로서의 매개물이다. 순탄한 주제도 시로서 녹여날 때 맛의 행방은 수없는 갈래가 된다. 그렇기에 곧 뼈대를 세워 살을 붙이고 호흡을 불어 진정한 생명력으로 피어날 때 우리는 그 시를 살아있는 시라 말한다. 그렇고보면 시의 생명은 시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읽어냄으로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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