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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인의 시,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 박숙인 꽃다발의 향기가 오래가지 않았지 푸른 잎 줄기마저 건기의 시간에 드니 그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헛헛함이 스며들어도 견고하게 자리를 지켜내며 잔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지 편지를 쓰고 지운 흔적처럼 저 꽃잎들은 향기를 잃어가고 내 안에 꽃도 그때 지고 말았지. 2021, 10.
희망마을에 다녀오다 / 박숙인 문득, 저 빈 곳을 채워가던 꽃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여 방문을 해봤다 고요가 닿은 오후의 시간 잠깐, 노을이 지는 창가에 기대어 희망마을에 피고 지던 꽃들이어서 외로움의 깊이를 어루만지다 왔다 당신과 내가 언제나 존재하는 먼 하늘과 같은. 2021, 10.
다시 쓰는 가을 / 박숙인 내 기다림이 시작되었던 너를 손끝으로 만져 본다 지난가을보다 더 창백해서 긴 편지를 써야 할 것 같다 계절만으로도 서로 닮아가기 때문이다 스치기만 하다 떠나지 않게 끊임없이 그의 중심이 되어 더 붉은 모습으로 나를 흔들어주기를 가는 길 쓸쓸하지 않게 한 걸음 한 걸음 그대의 뒤를 따라갈 것이니 저문 들녘의 휑한 바람처럼 뒷모습만 두고 떠나지는 마라. 2021, 10.
거리에서 / 박숙인 어디로 가는가, 묻지 않아도 누가 호명하지 않았는데도 군중 속의 나는 구경꾼이 되어 뒤돌아보게 된다 늘 거리의 풍경은 그랬었는데, 라고 단정 짓지는 말아야겠다 낯익은 것과 낯선 사이에서 코로나로 적당한 거리를 뒀던 거와는 다르게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상기 된 표정들이다 지난 시간의 고통을 털어내는 듯 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듯 붙어 있던 그들은 모퉁이 저쪽으로 사라지고 산책에 나선 나는 하릴없는 사람처럼 배회하며 모처럼 마음의 분주함 없이 걷고 있다 곁에서 걸어가는 사람 없이, 느긋하게 널뛰기하던 바람과 풋풋했던 추억으로도 콧등이 시큰해진다. 2022, 11. 3
나는 너의 가을이 되어/ 박숙인 이런 날은 가을에 기대어 산다 바람 부는 날은 그런 핑계로 지하철 승강장에 얼굴을 내민다 안녕, 하냐고 인사 나누지 않아도 그 가을 곁으로 가는 것뿐이다 가을 속을 걷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자작나무를 바라볼 때나 11월의 시간을 건너갈 때도 끊임없이 그 가을을 탐하고 있던 나를 본다 옥천사의 은행나무 앞에서 까르르 웃던 그녀들도 그립고 모퉁이 돌면 발에 밟히는 낙엽들을 손으로 모아 그래, 가슴 뛰던 그날처럼 늘 너희들이 나의 가을이었지. 2022, 11. 2
어느, 가을밤에 /박숙인 눈물 같은 빗소리를 듣는다 들릴 수밖에 없는 아픈 소리가 거짓처럼 사라지기를 돌아오지 못하는 죽음의 문턱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먹먹한 말들만 묻힐 뿐이다 근사한 청춘의 시간이 푸르러지 못하고 저 하늘에 별이 되었다 그 통곡의 시간은 꺼지지 않은 소중한 등불이 되어 그 이름, 그 밤의 시간들은 기록에 남을 것이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청춘들아! 어느 하루는 살 만했고 어느 하루는 막막했겠지만, 더는 아프지 마라 작별 인사도 없이 놓아버린 손! 떨어지는 나뭇잎들 사이로 이젠 새소리, 바람 소리도 들을 수 없겠지 따뜻한 가슴의 말 주고받지도 못하겠지 그날의 슬픔을 끌어안으며 두 손을 모은다. 2022, 11.2 ~~~~~~~~~~~~~~~~~ * 젊은 청춘들을 추모하며 삼가 고인..
가을, 내 곁에 두다 / 박숙인 낙엽을 앞에 두고 너무 슬퍼할 일은 아니다 낙엽 한 접시 벤치에 올려놓고 소꿉놀이하듯 만지작거리며 추억 놀이하는 것이니 그리움은 차올라 눈물 한 방울 훔쳐도 좋은 그런 가을날에는 노래가 되고 그대가 된다 시든 꽃, 지는 잎 앞에 두고도 너무 슬퍼할 일은 아니다 내 마음의 정원에 사랑으로 두고 있으니. 2022, 11. 2
어느 해, 11월의 시간 / 박숙인 한 곳으로 한 곳으로만 기우는 저녁이었다 뒤따르는 발걸음 소리만 들리는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나를 흔들어 놓았다 그 바람 소리는 소란스러워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창 밖의 불빛들과 길 위에 나뭇잎만 비껴가고 있을 뿐 멀리서 가까이서 요동치는 말들은 저 혼자 부르는 노래가 되고 깊은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눈물 꽃, 마침표 없는 시간은 마지막 풍경으로 남아 어느 강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202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