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박숙인의 시 ] (41)
박숙인의 시,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 / 박숙인 며칠 낮과 밤 사이 꽃샘추위 지나가고 태연스럽게 백목련이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듯 하늘 향해 피어 있다 매화꽃, 산수유, 개나리,목련의 순서로 봄꽃들이 한 창인데 그리워하는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듯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잠 못 이루던 어느 날엔 뒤척일 때마다 생각들 키우고 속도 내듯이 부푸는 풍선처럼 꽃들도 속도를 내고 있네. 2023, 3.15
봄곁에서 / 박숙인 길 따라 골목길에 들어서니 하늘 향해 손짓하는 목련이 반쯤 열린 창문처럼 꽃봉오리 주머니 속에 향기를 품고 있다 봄은 어느새 우리들 곁에 머물러 마디마다 피어나는 꽃잎들 시골 마을 옛집 담벼락에도 뜨거운 하늘 아래 찰랑거리는 저 꽃들을 아무도 모르게 껴안아 본다. 2023, 3.14
베란다에도 봄은 오고 있었다 / 박숙인 어둠을 걷어내는 아침 햇살이 들어찬 베란다에도 봄은 오고 있었다 손끝에 닿은 어둠과 빛 사이에 마른 줄기 사이로 어린 새순은 돋아나고 가지마다 매달린 잎들도 마주하며 웃고 있다 나도 다정해지고 싶어 쪼그려 앉아 눈은 즐겁게 그들을 바라보며 겨우내 춥지 않았냐고 묻는다 묵묵부답이지만 알 수 있었다. 사실은 춥다고 문 닫으라는 남편의 말에도 거실 창문을 열어 두면서 그 온기로 조금이나마 따스하기를 달밤에는 롤스크린 반쯤 올려주면서 외롭지 않기를, 며칠간 꽃샘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 오래 있어 줘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당신 안의 봄은 언제 오느냐고" 나도 문득 누군가의 질문이 떠올랐다 빛나는 나의 시간이 온다면 그 안에 봄꽃 향기로 머물고 싶은 날들일 것이..
당신의 시간 / 박숙인 장대비 쏟아붓던 그해 여름에 말 한마디 없이 그 안에 갇히어 멈춰버린 당신의 시간, 밤사이 바람이 먼저 다녀갑니다 묵묵히 귀 열어 놓고 엎치락뒤치락 침상에 기대어 찬란한 별들도 없는데 어쩌자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지 환하게 웃던 당신은 오늘 밤도 숨바꼭질하고 있나요, 2019, 1.
슬픔은 곁에 있었다 / 박숙인 햇빛 속에 먼지 날려도 휠체어와 한 몸이 된 얼굴에 엷은 미소에도 나직한 말들은 입안에서 중얼거리고 뒷말을 이어가다 시끄러움 속에 잠깐 침묵한다 널뛰기하는 감정을 끌고 가다 돌아오지 않아 슬픔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헤매다 긴 골목길에 들어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순한 얼굴로 울고 있네. 2019, 1.
저녁 6시의 침묵/ 박숙인 무심히 바라만 보고 조용하고 서늘하고, 그곳에 두고 온 노을에 마음 풀어 놓지 못하고 속절없이 아득함이 쌓여만 가는 것 같아 어둠을 만지듯이 더는 견딜 수 없어 다급함이 떨림의 시간 속으로 무엇을 원하지 않아도 걸어가도록, 뒀다 그 힘으로 견딜 수 있다면야 무엇인들 못 할까. 오로지 그뿐이었다. 2019, 1.
저 빈 곳에 / 박숙인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도 가끔 들여다보다가 돌아서 오는 마음자리엔 그늘이 들어앉아도 누구의 시간을 쓰기 위해서는 숨어간 문장을 꺼내어 꽃의 진자리, 향기로 채워간다면 환하던 시절과 계절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테지 이런 이유, 를 앞세워 가끔은 문을 열어 놓고 싶을 때가 있다 기억의 창고에 추억의 그림 걸어두고 그들 옆에서 한세월을 보내도 좋은, 저 빈 곳에도 환한 봄날이 오겠지. 2019, 3.
가늠할 수 없었던, 그 안에는 / 박숙인 골목길을 걷다가 조용히 소리에 귀 기울여도 다가갈 수 없어 극한의 고통은 정서를 파괴하고 가늠할 수 없는 그 슬픔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지, 하면서 서성거리기만 하다가 돌아서는데 꽃들도 돌아눕는다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는지 누구의 시간을 쓰기 위한 것이었는지, 빗방울이 어깨를 적실 때는 마음의 집에 장식 하고 싶은 것들을 쌓아 두며 사계절을 흘려보냈다 나의 소리, 더는 토닥거리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내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는 오늘은 문득, 내 이름을 불러 본다 잘 견뎌줘서 고마웠다고, 201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