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이만섭 시인 ] (33)
박숙인의 시, 그리고
작밭(小田) /카프카 사람은 누구나가 자기만의 뜰을 지니고 산다 그 일궈낸 자리가 마당가 나무그늘 옆 한 뼘 채마전이여도 좋고 모름지기 햇빛이 쪼아대는 토담 아래 양지뜸이여도 좋다 마당깊은 우물자리 담장 안쪽에 장미넝쿨을 올렸으니 구름도 쉬고 바람도 머문다 나의 작밭에 봄이 오고 꽃비가 내리면 그때 나는 무엇을 심을까 06.1.10
빗속의 기다림/카프카 이만섭 약속은 어둠속으로 떠났다 가슴도 그 사이에 젖어가고 파르르 떨고있을 그대 입술 하늘은 기다리는 마음을 이토록 지루하게 한다 정류장에도 막차가 오지않는다 철벅이는 발자욱 소리에 놀라 돌아보면 어둠등 사위는 소리 어디론가 가야만 하는데 그렇게 시간이 흘러야 되는데 필기체로 써 내려간 사연은 창에만 멈춰있다 모서리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어둠에 물든 그리움이 너무도 야속하다
영춘일기(迎春日記) 1 -예봉산에서 이만섭 입춘 지나고 나니 나무들이 연달아 기지개를 켠다 겨우내 포실한 숨결에 들었다가 잠 깬 자작나무도, 밋밋한 허리 감싸안고 푸른 꿈에 젖어있던 가무태나무도, 산골짜기 눈 녹는 소리에 가슴 벅차다 히끗히끗 잔설 박힌 숲 뒤란으로 가 보면 떨기나무 덤불 가에 바윗덩이 푸른 이끼 깨워놓고 묵묵히 앉아있다 언제 날아왔을까 흰 눈썹 달고 까불대는 동박새 생강나무 꽃눈 틔운 노오란 가지에서 저 혼자 영춘가를 부른다
파적도(破寂圖)를 보다 이만섭 적요의 한낮이 황급하다 복사꽃 만개한 뜨락에 화들짝 고요를 깨뜨리고 달아나는 검은 고양이의 눈빛, 봄이라야 오는 봄으로 치자면 저 혼비백산에도 버선발로 쫓아가는 노구의 몸은 한갓 꽃이 피는 줄만 알았겠지 바람이 아니어도 철없이 우듬지를 꺾고 가는 어처구니없이 속는 봄날이 야속하다 쩌억, 대를 가르듯 한바탕 파적으로 깨어나는 봄은 어찌 그르침만일까, *파적도: 긍제 김득신의 그림
첫눈에 대한 오해 이만섭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눈을 아주 두고두고 우려먹는다 다른 것들도 많은데 그러니까 저 하얗고 순수한, 눈에다가 마음을 붙여놓는다 사랑을 하니까 그럴 테지만 봄부터 첫눈이 내릴 때까지 그렇게 기다림에 들다가 정작 첫눈이 오는 날 봉숭아 꽃물이 손톱 끝에 초승달처럼 남아 허겁지겁 그리움을 찾아나설 때 문밖에 나가니 첫눈이 아, 첫눈이 다 녹아버렸구나
눈보라 속에서 /이만섭 가슴 속 그리움이 겨울에는 한 번쯤 하늘의 별이 된다 그런 날은 회색 연무에 취한 하늘이 허공에 흰 새떼들을 풀어놓고 길이며 강이며 나무에 날아와 사랑을 노래한다 보아라, 하늘 높은 곳으로부터 우리 곁을 찾아오는 별의 말들을, 잊지 못하는 것은 언젠가 저렇게 우리 곁을 찾아온다 눈빛마다 찬란을 열고 저들이 들려주는 순결한 사랑이야기를 대지는 두 팔을 펴 맞고 있다 별의 말을 간직한 내 마음도 먼 밖에 나가 그리움을 마중하고 있다
1) 직선의 방식 /이만섭 직선은 천성이 분명하다 바르고 기껍고 직선일수록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는 곧 정직한 내력을 지녔다 하겠는데 현악기의 줄처럼 그 힘을 팽창시켜 울리는 소리도 직선을 이루는 한 형식이다 나태하거나 느슨한 법 없이 망설이지 않고 배회하지 않으며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단순한 정직이다 밤하늘에 달이 차오를 때 지평선이 반듯하게 선을 긋고 열리는 일이나 별빛이 어둠 속을 뻗쳐와 여과 없이 눈빛과 마주치는 것도 직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령,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세우는 일은 직선의 힘을 얻어 허공을 가르며 쏘아대는 직사광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있다 그로 인하여 빨래는 마음 놓고 햇볕에 말릴 수 있을 것이다 바지랑대는 빨랫줄로 말미암고 빨랫줄은 바지랑대 때..
1) 푸른자화상 소백산에서 부쳐온 사과가 상자에 담지 않고 자루에 묶인 채 배달해왔다 사과를 주문한 아내도 나도 황당하여 묶인 끈을 풀고 들춰보니 온통 멍투성이다 이럴 수가, 과수원 주인은 왜 이처럼 보냈을까, 의아한 마음은 궁금증으로 환치된다 추측건대, 사과가 워낙 싱싱해서 운송 도중에 상자에서 뛰쳐나가기라도 할까 봐 포박해서 부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쏟아놓고 보니 깊이 들어박힌 사과 하나 설상가상 아직 푸른빛이다 그래서 자루의 안쪽에 처박힌 것일까, 가만히 집어 들고 차운 볼을 만지듯 손끝의 온기로 사과의 표피를 가벼이 문지른다 그래 나도 나를 익혀내지 못해 이 가을의 끝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꿈꾸는 존재다 고산지 맑은 햇빛에 익어가던 열매들 틈에서 일조량을 온전히 받지 못하고 두고두고 밀알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