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이만섭 시인 ] (33)
박숙인의 시, 그리고
마른꽃 소묘 / 이만섭 왜 그런거 있지, 추억을 붙박아놓고 싶은 거 저것이 지난날의 그리움이었나니, 저 꽃 필 때 봄이였던가 한 차례 가랑비 다녀가고 연두로 옷 입던 나무들 가슴에 골짜기바람 불던 날 붉자고 핀 꽃 지고 아, 생은 막막했다 떨어진 꽃잎 바라보며 강물따라 흐르고 싶었던 회한, 꽃은 어쩌자고 피어 꽃 지는 가슴은 그리도 슬펐던가 후리지아를 내다 버린 적이 있는가, 꽃다발을 받았을 때 환희를 간직하고 싶은 적이 있었는가, 꽃이 진 후에도 꽃은 화석으로 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음벽에 걸린 꽃을 본다
詩, 어떻게 읽을 것인가. 퇴고(推敲)에 대하여 /이만섭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자고 스님은 달 아래 절 문을 민다." 그러나 이 "민다."(推)라는 말보다는 "두드린다."(敲) 라는 말이 더 나을까, 스승 한유(韓愈) 앞에 가도(賈島)의 의중은 어떠했을까! 주지하다시피 퇴고(推敲)란 시문 따위의 기왕에 쓰인 문장의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한 끝에 고치는 행위이다. 말하자면 글을 더 충실히 다듬어서 온전하게 만드는 일종의 고쳐쓰는 글쓰기의 일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쓰는 사람이라면 다 겪어보았을 터이지만 고치고 또 고치고, 아무리 고쳐도 처음 글만 못할 때가 있다. 이런 불만족의 경우는 어째서 생기는 것일까. 짐작건대 주제의식의 빈약함이 요인이 아닌가 싶다. 가령 한 편의 시를 쓸 때, 어떤 이..
물들어 간다는 것/ 이만섭 언제부터 이였을까,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온전히 물들기 시작한 때는, 그 계절의 나무가 표피를 벗고 온몸으로 푸르게 눈 뜰 때, 우리의 눈빛도 서로의 가슴에 닿아 그렇게 초록으로 물들어 갔을 것이다 견딜 수 없는 푸름으로 잎 짓고 다가오던 그리움의 숲, 풀숲은 현호색이 마중을 나와 미소 띤 얼굴로 색 고운 자주 빛 향연을 펼칠 때, 땅속 깊은 우물가에서 삼목의 뿌리는 종일토록 샘물을 길어 나르고 새들은 가지에 날아와 부리를 조아대며 푸른 계절을 노래하고 나뭇잎은 분수 같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청록으로 눈부시고, 깃털의 가벼움을 허공에 돋아놓고도 마음 깊이로 흐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들어가는 것이다 휘장을 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노을보다 붉은 마음이라면 거기, 물들어간 ..
쓸쓸함으로 걸었네/ 이만섭 눈부신 날들을 등지고 떠나와 빛그늘 들어선 바람의 모롱이에서 쓸쓸함으로 걸었네 일상의 허물들을 한번은 벗어놓고 싶었네 붉은 낙엽송은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예리한 침을 세워 살갗을 파고들며 바위틈의 물소리도 잦아진 호젓한 곳에서, 내 마음의 그늘 속을 터벅거렸네 산까치 날아간 졸가리 아래 온기를 놓고간 그곳에 한동안 서서 내 마음이 걸어온 길을 가만히 돌아보았네 멀리서 누군가가 그리움을 찾아 홀로 헤매네 쓸쓸하지 않고서 깃드는 그리움은 헛된 것임을 나는 보네 그곳의 시간들이 계절을 다 보내고 어둠이 옅은 수묵색으로 번져 올 때 나는 떠나간 길을 다시 돌아오네 돌아오는 길에 발끝에 부딪히는 돌부리, 돌부리가 먼저 손을 잡아 주었네 다시 넘어지지 말 것을 내게 당부하고 있었네
새벽 / 이만섭 아침이 들어설 자리에 어둠은 왜 정화수를 떠놓았을까 객지를 떠도는 자식 걱정에 일찍 잠 깬 홀로 사는 어머니의 부뚜막처럼 검게 그을린 천장이며 아직, 솥뚜껑 같은 미명 속에서도 사위에 맑은 정성 담아놓았다 몸 미치는 곳이면 어디에도 옷자락 이슬 젖은 채 아침 햇살 환하게 비쳐오는 먼동을 꿈꾸는, 빔의 모퉁이와 아침의 문설주 사이에서 잠 깨는 집들도 처마 끝에 깃든 검푸른 허공을 거둬내고 칼칼한 찬 공기 들이마시며 여명이 메어놓은 사리 빗자루 더듬더듬 찾아 대문 가에 세운다.
칠월의 푸라타나스/이만섭 해질 무렵 텅 빈 창가에 그리움 하나가 스치듯 놓이고 포도 위를 걸어가는 푸라타나스를 바라본다 머리 위에 가득한 푸른 잎 등으로 검붉게 채곡이는 빛살은 꿈으로 젖어간 날들이 어느덧 가을녁에 닿고 있다 나무는 바람이 불어 올 때 그 황량함 속에서 꿈이 영그는가 뭇 기다림으로 채워간 열망이 하늬바람 한 점에도 촉수처럼 흐느적이고 있으니 저토록 외로워 함이 마침내 가로등되어 기다림의 등을 내리고 있다 그리움이 어둠속에서 헬슥한 얼굴로 피어난다 이쯤에 누구인들 젖지 않을 사랑이 있을까 나는 단 하나의 계절만 사랑하고 싶다 순결도 아픔도 다 그곳에다 내려 놓고 어둠도 그렇듯 견디어 내고 싶다 태양의 자리에 별빛이 내리고 이 밤도 푸른 잎 바스락이며 너에 가슴에는 꿈들이 박히고 있다
꿈길에서 / 이만섭 눈감으면 이슬로 돋는 해맑은 얼굴 별이 숲이 되는 밤은 심연에서도 찬란한 하늘이 보였다 침잠의 횃대 속 그리움은 밤마다 찾아들어 푸른방을 지어놓고 따스한 숨결로 채운다 요요하게 달빛 흐르는 숲속 밤새도록 헤매이고 헤매이다가 마침내 다다른 개울 저 편 안개에 젖은 밤이 아늑한 새벽의 품에 들 때 꿈은 스르르 문을 열고 나선다 아, 애틋한 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