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이만섭 시인 ] (33)
박숙인의 시, 그리고
말하는 꽃/ 이만섭 꽃의 웃음을 귀담으면 말하는 꽃의 소리가 들린다 한낮, 붉은 칸나의 입술에 앉은 잠자리도 꽃의 말을 고요로 엿듣고 있다 꽃이란 꽃은 일상을 찾아오면 모두 말한다 우리에게 노래와 웃음까지 함초롬히 들려준다 꽃이 말하는 동안 환희에 젖은 내가 웃는다
슬픔/ 이만섭 꽃 지는 저녁은 강 울음 잦아지고 바람이 세우고 간 마음 벽에 쉼 없이 물 쳐와 얼룩지는 푸른 빛 물은 살(肉) 속으로 파고들어 과육처럼 견고한 맛으로 박혀 눈물이 되지 않으면 그리움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처연함은 깊디 깊은 우물이라 해도 바닥에 이르도록 퍼내야 함을, 땅거미 깔리는 저녁 무덤처럼 잠기는 아픔이여!
조그마한 사랑 그리기/ 이만섭 나는 조그마한 사랑밖에 그리지 못합니다 손이 작아서요 다들 사랑을 크게만 그린다 하지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어깨 힘주고 죽죽 긋는 그런 사랑은 할 수 없는 것을,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요 크게 그리려다가 함부로 뻗어간 붓 자국은 비백(飛白) 투성이, 얼추 보아도 뽐내는 듯 그래서도 싫어요 내 안에 들어온 사람 자랑 하지 않고 한결같이 그저 그 사랑만 그리고 싶어요
저녁의 낱말들을 묵독하다 /이만섭 점등하는 불빛 앞세워 어둠이 펴놓은 낱말들을 읽는 저녁이다 조금 전까지 무언극이라도 하듯 저녁빛 비낀 가문비나무 그림자 어둠 뒤꼍으로 자취 감추고 낮 동안 흘러온 시간의 강물 그득하다 강물은 흐르다가도 저녁이 오면 몸을 낮춰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이 사위를 휘감고 넘실거린다 어둑어둑 번져오는 넉넉한 물이랑 불빛 받아 물결의 윗자락에 적힌 붓자국의 비백 같은 흰 부분이 이 저녁에 읽는 낱말이다 불온한 욕망처럼 황혼을 달구며 혼자 타오르던 노을은 서녘 하늘 검게 그을려놓고 총총 사위었다 그래서인지 어둠은 더 짙게 배어있다 괭이자루 쥐고 일군 내 안의 텃밭이라도 소리 없이 적시는 이슬 기다리며 흙속의 씨앗 재우는 저녁이어야 한다 재넘이 빠져나간 담장 가에도 짙게 배인 어둠의..
고양(高揚)된존재론적 언어 / 이만섭 소설의 허구에 반하여 시의 진실성은 자신을 쓰는 문학이다. 시의 언어는 나를 중심점으로 대상과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맞춘 ‘초점(焦點)’의 언어라 할 수 있겠는데, 그렇기에 대상에 대해 시인처럼 투철하게 파고드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특히 현대시는 언어를 가공하여 세분화 시키는 데 매우 능숙하다. 그렇기에 그 무엇도 시로 소화해낼 수 있는 변용의 능력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엄격한 시적 범주를 요구한다. 이제 우리는 가설의 말에 골몰하지 말자. 예컨데 시란 무엇인가 라는 애매한 질문보다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차라리 그때그때 나를 새롭게 드러내는 성찰의 언어로 대체했으면 좋을성 싶다. 그것이 곧 시인에게도 무엇을 쓸 것인가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 라는 쓰는 문제에 ..
날짜를 짚다 / 이만섭 일월의 바큇살은 투명해서 굴러가는 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새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싣고 있지 요철 자국 없는 수레바퀴이건만 나날을 더해 계절을 맞이하고 나이를 헤아린다. 누군가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딱 기억하기 좋은 새날을 기다리다가 오늘을 잊고 약속을 어긴 어제는 얼마나 많은가, 생활이란 끊임없는 명분들의 놀이터 오늘의 생각을 추스르다 들여다본 달력에 갑자기 날아든 새 한 마리 붉은 열매로 익은 공휴일의 숫자를 물고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계산된 날짜에서 멀뚱히 하루를 놓치고 허탈함에 투정을 부리는데 손가락으로 꾹 눌러 달력 속에 주저앉힌 숫자가 일월에 속은 패일까, ⸺반년간 《상상인》 2021년 1월, 창간호 ------------------ 이만섭 / 1954년 전북 ..
저녁 강 /이만섭 흐를 수 있다면 흐를 수 있는 곳까지 가 보리라, 골짜기를 떠나온 물이 아홉 구비가 아니고서 어찌 강물에 닿을 수 있으리 그대를 향하여 하나의 마음이고자 노을빛 아래서 숨결 짓는 강물, 바다에 이르러 한 세상 아름답게 흘러왔다고 말하리라
실밥 /이만섭 허름한 옷에서 밥 짓는 냄새가 솔솔 난다 한 몸 가리어 풍상을 견디다 보니 타개진 솔기 사이에서 앵돌아 나오는 밥, 기제사에 메를 짓고 내오듯 밥은 끈기 잃어 퍼석퍼석하다 그간 옷은 말 못할 거식증에 시달린 것일까, 육감적으로 부끄러운 표정이다 몸의 접경지대에서 오랜 세월 부지하며 어미의 탯줄 같은 실을 빌어 옷을 먹여 살리더니 이제 저렇게 고스레처럼 문 밖에 내놓는다 산목숨인들 밥 거두면 그만일 진데 아무리 옷인들 아니 그럴까, 세월마당에 낡아진 옷이 실밥을 지어놓고 도대체 후줄그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