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시론 문학이론] (96)
박숙인의 시, 그리고
조승래의 「적막이 오는 순서」 감상 / 나민애 적막이 오는 순서 조승래(1959~ ) 여름 내내 방충망에 붙어 울던 매미. 어느 날 도막난 소리를 끝으로 조용해 졌다 잘 가거라, 불편했던 동거여 본래 공존이란 없었던 것 매미 그렇게 떠나시고 누가 걸어 놓은 것일까 적멸에 든 서쪽 하늘, 말랑한 구름 한 덩이 떠 있다 ................................................................................................................................. 여름은 격렬하다. 그것은 타는 듯한 열기와 소란스러운 매미 소리와 장맛비 같은 것으로 온다. 해가 갈수록 여름은 뜨거워지고, 세월이 지날수록 여름은 부담스럽다. ..
장이지의 「꿈의 범람」 감상 / 최형심 꿈의 범람 / 장이지 당신은 밤을 데리고 온다 밤은 오레오 맛, 혹은 담배 냄새가 난다 유리창 너머에서 도시가 비의 부식(腐蝕)을 견딘다 유리창을 응시하면 얼굴이 흘러내린다 손바닥으로 거듭 지워도 본능은 거기 있다 나는 외면하면서 나의 이면과 마주한다 백지와 마주할 때 나는 역광을, 광배(光背)를 얻는다 어떤 섬광이 흰 벽에 흘러내리는 새장을 그렸다가 지운다 지우개가 작업한다 내가 쓴 시의 암호들이 하나씩 지워져간다 나는 지우개로 쓴 편지를 접어 그림자 새에게 맡긴다 새를 따라 당신에게로 간다 꿈의 비옥한 범람 속으로, 도살장으로, 두께 없는 무간(無間)으로 ..............................................................
이준관의 「하늘 바라기」 감상 / 나민애 하늘 바라기 이준관(1949~ ) 청보리밭 청하늘 종다리 울어대면 어머니는 아지랑이로 장독대 닦아놓고 나는 아지랑이로 마당 쓸어놓고 왠지 모를 그리움에 눈언저리 시큰거려 머언 하늘 바라기 했지 ............................................................................................................................... 김영하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읽다 보면 ‘호모 비아토르’라는 단어가 나온다. ‘여행하는 인간’이라는 뜻인데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인간을 이렇게 정의했다는 설명이다. 인류란 무엇인가를 쫓아가고 이동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는 본질..
황동규의 「더 조그만 사랑 노래」 감상 / 김경복 더 조그만 사랑 노래 황동규 아직 멎지 않은 몇 편의 바람. 저녁 한끼에 내리는 젖은 눈, 혹은 채 내리지 않고 공중에서 녹아 한없이 달려오는 물방울, 그대 문득 손을 펼칠때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 ...................................................................................................................................... 응결되는 것은 단단하면서 아름답다. 금강석이 그러하고 수정이 그러하다. ‘조그맣게, 더 조그맣게’ 응축되는 것은 안에 강력한 힘을 끌어안고 있어 아슬아슬하고 위태롭지만 그 힘의 내뿜는 빛..
박재삼의 「여름 가고 가을 오듯」 감상 / 나민애 여름 가고 가을 오듯 박재삼(1933~1997) 여름 가고 가을 오듯 해가 지고 달이 솟더니, 땀을 뿌리고 오곡을 거두듯이 햇볕 시달림을 당하고 별빛 보석을 줍더니, 아, 사랑이여 귀중한 울음을 바치고 이제는 바꿀 수 없는 노래를 찾는가. .................................................................................................................................... 시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 유명하기 때문에 박재삼은 가을을 대표하는 시인처럼 보인다. 쓸쓸하니 고적한 말투 때문에 더욱 가을을 상징하는 시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시집을 읽다 보..
정영효의 시 「언덕을 넘는 사람들」 감상 / 유희경 언덕을 넘는 사람들 정영효 확실함을 믿지 않는 곳에서는 가장 현명한 해결책을 질문이라고 부른다 어딘가에 숨어서 이유를 구성하고 있다는 지금은 질문이 필요해 너는 질문을 만나는 게 좋겠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생활을 잃은 이들이 질문을 찾아 언덕을 넘는다 질문은 예상을 빼면 모르는 시작이거나 마지막을 떠올리고 마주하게 되는 자리 많은 걸 인정할수록 채워지는 내용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결론 속에 자신을 보태고 나면 질문은 분명한 사실로 자라난다 가장 먼저 나타나므로 다른 의심은 확인할 수 없는 언덕을 뒤로한 채 그곳에서는 질문을 찾지 못하고 돌아온 일을 생각이라고 부른다 실패가 계속 목적을 만들었기 때문에 여전히 질문을 원하며 생각에 대..
김혜수의 「기억을 버리는 법」 감상 / 박준 기억을 버리는 법 김혜수 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 상자 속에 넣어 높은 곳에 올려놓는다 가끔 시선이 상자에 닿는다 쳐다보고만 있자니 좀 그런 것들을 더 큰 상자에 넣어 창고 속에 밀어버린다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모서리가 삭아내리는 것들 자주 소멸을 꿈꾸며 닳아 내부조차 지워져버린 것들 가끔 생각이 창고에 닿는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점차 생각조차 희박해지고 창고를 넣을 더 큰 상자가 없을 때 그때 상자 속의 것들은 버려진다 나도, 자주, 그렇게 잊혀갔으리라 -시집『이상한 야유회』 (창비 2010) ..........................................................................................
나희덕의 「새는 날아가고」 감상 / 주민현 새는 날아가고 나희덕 새가 심장을 물고 날아갔어 창밖은 고요해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접시를 앞에 두고 거기 놓인 사과를 베어 물었지 사과는 조금 전까지 붉게 두근거렸어 사과는 접시의 심장이었을까 사과 씨는 사과의 심장이었을까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담겼다 비워지지 심장을 잃어버린 것들의 박동을 너는 들어본 적 있니? 둘레로 퍼지는 침묵의 빛, 사과를 잃어버리고도 접시가 깨지지 않은 것처럼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식탁과 접시는 말없이 둥글고 창밖은 고요해 괄호처럼 입을 벌리는 빈 접시, 새는 날아가고 나는 다른 심장들을 훔치고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만났다 헤어지지 ―시집 『야생사과』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