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시론 문학이론] (96)
박숙인의 시, 그리고
김수영의 「여름 아침」 감상 / 곽재구 여름 아침 김수영 여름 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 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취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진 햇살이 산 위를 걸어 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우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고뇌여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내려 가는데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
최승자, 「한 세월이 있었다」감상 / 황인숙 한 세월이 있었다 최승자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 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시집『쓸쓸해서 머나먼』(2010년) ..........................................................................................................................................................................................
자작시 해설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 강인한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강인한 아픔 위에 아픔을 붓는 밤의 크고 고요한 손을 본다. 누군가의 나직한 잠이 흐르고 잠 속으로 툭 떨어지는 빗방울이었다, 나는. 멀리서 가까이서 뿌옇게 내리는 가을의 분별, 회복할 수 없는 어둠을 토하며 지금 내 피는 닳는다. 새도록 떠다니는 잠의 바다여. 묵은 책갈피에 오래 파묻혔던 내 손은 눈을 뜬다. 목질의 가느다란 실핏줄과 물결 소리를 자욱이 풀어준다. 사물은 내 피가 닳는 저 어둠의 뒤에서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
윤진화의 「안부」 감상 / 나민애 안부 윤진화(1974~ ) 잘 지냈나요? 나는 아직도 봄이면서 무럭무럭 늙고 있습니다. 그래요, 근래 '잘 늙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 세계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읊조립니다. 당신이 보낸 편지 속에 가득한 혁명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당신에게 답장을 합니다. 모쪼록 건강하세요. 나도 당신처럼 시를 섬기며 살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부끄럽지 않게 보낼 겁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다음 계절을 기다리겠습니다. .....................................................
바위의 이끼는 늙지 않았다 이어령(전 이화여대 교수·전 문화부장관) 사람들의 인상은 대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동물, 식물, 광물…. 그런데 한승헌 변호사의 첫인상, 그리고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보아온 한 변호사의 이미지는 광물성이다. 몸이 깐깐하게 말라 있다는 그만한 이유에서 차돌과 같은 돌에 비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돌이 아니라 전통 산수화에 나오는 것 같은 바위, 그러면서도 파랗게 이끼가 낀 그런 돌인 것이다. 외유내강이라는 말은 너무 상투적이라 ‘바위와 이끼’라는 말로밖에는 한 변호사의 품성을 표현할 길이 없다. 겉으로는 늘 푸르고 부드러운 이끼가 돋아 있다. 그것이 한 변호사 특유의 휴머니즘이다. 한 변호사는 만나면 늘 농담을 한다. 입술에는 막 흙장난을 하다 일어선 아이처럼..
진은영의 「청혼」감상 / 신미나 청혼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도 그랬듯 미래에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 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
박지웅의 「흰색의 역사」 해설 / 최형심 흰색의 역사 박지웅 늦가을 공중 흰 숲에 파랗고 파르스름한 길 한 가닥 어림쳐 시오리가량 열리더니 백록(白鹿) 하나 걸어 내려왔다 녹명(鹿鳴)으로 무리를 부르자 불현듯 구름을 이루는 기러기 백리(白鯉), 흰긴수염고래, 흰색을 까마득히 여미며 몰려드는 흰 피를 가진 생물들, 시름시름 무거워진 공중이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비단산 등성이에 첫 눈을 소복소복 내려놓았다 그 흰색의 하류에 갓 젖을 뗀 어린것이 한두 걸음 다가가서는 눈의 새순을 똑똑 뜯어먹는 것이었다 이런 날 천상과 지상은 구천(九泉)을 돌던 영혼과 첫눈을 맞바꾸는데 바람은 또 어디서 흰 관을 짜서 밀고 들어오는지 겹잎을 이룬 화문(花紋)이 구름숲에 내내 어리었다 저 흰색들의 빈소에서 가볍게 수백 번 소..
이영옥의 「11월」 감상 / 김정수 11월 이영옥(1960~ ) 나를 한 장 넘겼더니 살은 다 발라 먹고 뼈만 남은 날이었다 당신이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나의 마지막 외침을 흔들어 버리면 새가 떨어진 침묵을 쪼아 올리는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텅 빈 하늘 아래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목소리는 누구인가 깊고 깊어서 부스러기도 없이 뼈만 앙상하게 만져지는 기억들 미처 사랑해 주지 못했던 사랑처럼 남겨진 몇 개는 그냥 두기로 했다 오래된 노래처럼 내 귓속에서 흥얼거리며 살도록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