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시론 문학이론] (96)
박숙인의 시, 그리고
문성해의 「결이라는 말」 감상 / 박준 결이라는 말 문성해 결이라는 말은 살짝 묻어 있다는 말 덧칠되어 있다는 말 살결 밤결 물결은 살이 밤이 물이 살짝 곁을 내주었단 말 와서 앉았다 가도 된단 말 그리하여 나는 살에도 밤에도 물에도 스밀 수 있단 말 쭈뼛거리는 내게 방석을 내주는 말 결을 가진 말들은 고여 있기보단 어딘가로 흐르는 중이고 씨앗을 심어도 될 만큼 그 말 속에 진종일 물기를 머금는 말 바람결 잠결 꿈결이 모두모두 그러한 말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 2012 ........................................................................................................................... 종이는 저마..
어떤 그림 이병률 미술관 두 사람은 각자 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사람들에게 그림은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만지고 쓰다듬는 일이 중요하단 걸 알았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합의 하에 새로 정한 임무처럼 항상 방을 나란히 옮겨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림 안에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 무수한 공간을..
신달자의 「낙엽송」 감상 / 나민애 낙엽송/ 신달자 가지 끝에 서서 떨어졌지만 저것들은 나무의 내장들이다 어머니의 손끝을 거쳐 어머니의 가슴을 훑어 간 딸들의 저 인생 좀 봐 어머니가 푹푹 끓이던 속 터진 내장들이다 ............................................................................................................................................... 수능 시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우리 애 재수한다’고 말하는 친구를 만났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표정은 피곤해 보였다. 그녀의 남은 힘은 그녀의 몫이 아니다. 그건 모두 ‘우리 애’에게 가 있을 것이다. 왜 모르겠는가. 아이도 힘..
문태준의 「첫눈」 감상 / 이설야 첫눈 문태준(1970~ ) 오늘 밤에 정말이지, 앞이 캄캄한 밤에 첫눈이 찾아왔지 하늘에 모공(毛孔)이 있나 싶었지 실처럼 가느다란 빛처럼 흰 목소리 땅속에 파뿌리 내려가듯 내려오는 거였어 예전에 온 듯도 한데 누구이실까 손바닥에 손바닥에 가만히 앉히니 내 피에 뜨거운 내 피에 녹아 녹아서 사라진 얼굴 ........................................................................................................................................................ 첫눈이 왔다. 아직 가을을 다 보내지 못했는데, 겨울의 첫 마음이 불쑥 도착했다. 귀뚜라미도 제 울음..
'최휘의 「사과의 생일」 해설 / 김륭 사과의 생일 최 휘 아, 찬란해 나는 이 세상 최초의 열매 나로 인해 빨강이 생겨났지 온 힘으로 매달려 중력을 거부해 보았어 거부하느라 얼마나 빨개졌는지 몰라 빨강 전구들이 일제히 불을 켠 양지 언덕 빨강 사과 하나 빨강 사과 둘 빨강 사과 셋 넷…… 엄마는 동생을 낳고 햇빛은 사과를 낳고 사과는 빨강을 낳고 저길 봐 세상 모든 사과들이 태어나고 있어 끝없는 빨강들이 태어나고 있어 오늘은 사과의 생일,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을래 ―동시마중 레터링 서비스 《블랙》 제35호 .................................................................................................................
박후기의 「자반고등어」 감상 / 최형심 자반고등어/ 박후기 가난한 아버지가 가련한 아들을 껴안고 잠든 밤 마른 이불과 따끈따끈한 요리를 꿈꾸며 잠든 밤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껴안고 잠든 밤 소금 같은 싸락눈이 신문지 갈피를 넘기며 염장을 지르는, 지하역의 겨울밤 .............................................................................................................................. 막차가 끊긴 지하철역, 소금처럼 하얀 눈이 계단으로 들이칩니다. 계단 아래에는 가련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의 체온을 포갠 채 잠들어 있습니다. 마치 큰 고등어에 작은 고등어를 포개 놓은 것처럼 아버지가 아들을 꼭 껴안고 ..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 감상 / 박준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다리리 바람이 잦아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 제 어머니는 꽃과 나무를 좋아하지만 꽃구경이나 단풍놀이를 가는 법이 없습니다. 이른 봄, 진해나 구례쯤 가자고 해도 싫다고 합니다. 깊은 가을, 설악이나 내장산에 한번 가보자는 제안도 매번 거절합니다. 아니 세상 쓸데없는 일이라 깎아내립니다...
박판식의 「화남풍경」 감상 / 나민애 화남풍경 박판식(1973~ )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 ................................................................................................................................ 얼마 전에 박판식 시인이 상을 받았다. 수상 기사를 접하자마자 「화남풍경」이 떠올랐다. 시인의 첫 시집, 첫 페이지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