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시론 문학이론] (96)
박숙인의 시, 그리고
문저온의 「두 개의 토르소가 있는 방」 감상 / 성윤석 두 개의 토르소가 있는 방 문저온(1973~ ) 가슴에 손이 돋기를 악수를 하고 네 뺨을 치기를 가까이 가까이서 너를 만지기를 볼을 쓸고 목을 조르기를 다리라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 네가 오기를 없는 다리로 굴러오기를 없는 손발로 차렷하기를 네 가슴을 가르고 손을 꺼내기를 꺼낸 손을 가슴팍에 붙여 주기를 실수失手를 부디 만회하기를 피 묻은 악수를 하고 손을 뽑아 던지기를 - 문예지 〈문학과의식〉 2020 여름호 .......................................................................................................................................
김사인의 「코스모스」 감상 / 나민애 코스모스 김사인(1956~)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 소설가 이태준의 수필 중에 ‘가을꽃’이라는 짧은 글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이다.’ 갑자기 가을꽃이 짠하면서도 거룩하게 느껴진다. 이태준이 ..
신용목의 「백운산 업고 가을 오다」 감상 / 나민애 백운산 업고 가을 오다 신용목(1974~ ) 타는 가을 산, 백운 계곡 가는 여울의 찬 목소리 야트막한 중턱에 앉아 소 이루다 추분 벗듯 고요한 소에 낙엽 한 장 떠 지금, 파르르르 물 어깨 떨린다 물속으로 떨어진 하늘 한 귀가 붉은 잎을 구름 위로 띄운다 마음이 삭아 바람 더는 산 오르지 못한다 하루가 너무 높다 맑은 숨 고여 저 물, 오래전에 승천하고 싶었으나 아직 세상에 경사가 남아 백운산 흰 이마를 짚고 파르르르 떨림 ........................................................................................................................ 이 시를 쓴 신..
꿈과 발푸르기스의 거봉 김혜린 커다랗고 탐스러운 포도 봉우리가 짙게 빛나고 있다 알이 크고 빽빽한 거봉은 익기 전에 속부터 썩어 들어갈 것이다 나는 모두가 썩기 전에 서둘러 포도알을 솎아야 한다 이건 너희에겐 할 수 없었던 이야기야 죽은 사람이 또 죽는 꿈을 꾸었다 숯이 또 재가 되는 것처럼 타오르는 배경 안에서 나는 무너지는 몸을 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아무도 묻을 수 없었다 꿈속에서 내 몸은 무덤이 된다 송이송이 열리는 열매들은 곧 시체가 된다 검고 짙은 보랏빛 무덤은 어느 가정의 베개처럼 습하고 눅눅하다 포도알 위로 포도알들이 쏟아진다 왜 죽은 사람이 또 죽을 수 있는 걸까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여자들은 맨발로 무덤을 밟으며 봉우리를 넘어간다 오른발을 땅에 딛고 왼발은 허공을 ..
바닥 김기택 제대로 한 방 맞았다 바닥이 휘두른 펀치가 어찌나 세던지 눈두덩이 이 센티미터나 찢어지고 피가 터졌다 점점 높아지는 책장을 정리하고 있을 때 내 몸을 받쳐 주던 의자가 발에 밟히는 게 불편했던지 제 몸을 살짝 뒤틀었는데 순간 중심을 잃은 다리는 의자에서 껑충 뛰어올랐고 머리는 의자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때 바닥이 솟구쳐 올라 왼쪽 눈과 뺨을 세차게 갈겼던 것이다 늘 발밑에만 있어서 바닥이었는데 늘 보아도 보이지 않아서 바닥이었는데 몸통이 고꾸라지는 바로 그 순간 바닥은 머리 위에 있었다 큰 절을 받듯 높은 곳에 앉아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가 바닥에 접속되는 순간 별들이 있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수많은 별이 번쩍번쩍 튀어 올랐다 바닥에 그토록 많은 별이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얼굴이 피를 흘..
김정수, 「수면 위의 수면」 감상 / 이설야 수면 위의 수면 김정수(1963~ ) 늦은 밤, 아이들을 재우고 아내와 홍제천을 산책하다 물결 속 바위 위에 잠든 청둥오리 가족을 본다 흐름에 몸 맡긴 고요한 풍경에도 선잠이 든 놈이 있다 두런두런, 허방을 짚는 발걸음에 고갤 쳐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살금과 슬금 사이의 불안한 수면 위의 수면 어둠과 수풀 너머 사냥의 본능 순간의 방심은 생의 목덜미에 송곳니 푸드득, 허공을 때리는 다급한 날갯짓 혹시, 문은 잘 잠갔나? 걱정이 두려움으로 몸 바꾸는 아내의 손이 흥건하다 .............................................................................................................
진은영의 「이 모든 것」 감상 / 최형심 이 모든 것 진은영 비눗방울 하나가 투명한 기쁨으로 무한히 부풀어 오를 것 같다 장미색의 궁전이 있는 도시로 널 데려갈 수 있을 것 같다 겨울과 저녁 사이 밤색 털 달린 어지러운 입맞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광활한 사랑의 벨벳으로 모든 걸 가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배고픈 갈매기가 하늘의 마른 젖꼭지를 심하게 빨아대는 통에 물 위로 흰 이빨 자국이 날아가는 것 같다 이 도시는 똑같은 문장 하나를 영원히 받아쓰는 아이와 같다 판잣집이 젖니처럼 빠지고 붉은 달 위로 던져졌다 피와 검댕으로 얼룩진 술병이 흰 비탈에서 굴러온다 첫 시집의 변치 않는 한 줄을 마지막 시집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청춘은 글쎄…… 가버린 것 같다 수천 개의 회색 ..
이윤설의 「그 집 앞」 감상 / 박소란 그 집 앞 이윤설(1969~2020) 그의 무덤은 털모자처럼 따뜻해 보여요 그는 옆으로 누워 책을 뒤적이겠죠 남모르는 창이 있어 그리로 내다보기도 하겠죠 가을 오는 숲이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걸 턱 괴고 바라보겠죠 냄비에 밥도 지어먹고 빨래도 하고 둥근 천장에 닿지 않도록 고개 숙이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담배도 피울 겁니다 하나도 변함이 없다고 편지도 쓸 겁니다 남모르는 창에도 어둠이 내리고 그는 창가에 앉아 생각하겠죠 이렇게 변함이 없는 걸 왜 항상 두려워했을까 털모자처럼 귀를 가리는 혼자만의 방을 갖는 것인 걸 왜 그렇게 두려워 울었을까 양치질을 하며 발을 닦고 잠자리에 누울 겁니다 잠자리에 누워 코도 골겠죠 그의 습관이니까요 꿈도 꿀까요 죽는 꿈을 꾸며 가위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