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이향아 선생님 ] (20)
박숙인의 시, 그리고
땅의 경계 외 4편 정복한 땅을 분배할 때에 승리의 기쁨은 내 것이 아니야. 헝클어진 머리카락 가지런히 눕혀 젖떨어진 새끼당나귀처럼 귀를 세우겠습니다, 우물 속 같은 참을성으로 기다리겠습니다. 바람에 시달리는 들풀과 포도나무 마른 잎, 만나가 끝나버린 벌판에서, 성읍과 촌락과 광야와 목초지, 땅의 경계를 지키겠습니다. 여호수아여, 스스로 번쩍거리거나 우레처럼 위협하거나 샅바를 틀어잡고 몸부림하지는 않았지만, 행여 어찌 될까 침묵하겠습니다, 피 묻은 경계를 지키겠습니다. 속에 고인 말씀은 금은보화로 묻어버리고, 약속의 땅은 왕이신 당신과 엎드린 나 사이의 경계, 예절이며, 법도이며, 명령인 경계. 분쟁이 없이 살겠습니다, 소리 내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그 땅으로 돌아오다 모세 따라 홍해 건너 광야에서 4..
봄비 외 4편 이향아 어제 맞은 비가 예사롭지 않다 언 땅에 꽂히는 은 송곳처럼 오늘 아침 뼈마디가 저리는 것은 칼 빛보다 날쌔게 굳은 흙 풀어 연한 허리 새싹을 뽑아 올리는 것은 하늘은 생즙 같은 빗물을 걸러 똑,똑,똑 보통으로 문을 두드리고 내 몸은 골천 마디 어긋나서 흔들린다 이 비에 견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봄비 맞은 삭신이 예사롭지 않다. 봄, 더구나 밤 밤이었다 꽃들이 제 안에 길을 트고서 보란 듯이 나도 한 번 피어나려고 있는 대로 피를 모아 낯을 붉히는 멍들어 터질 듯이 약올라 있는 봄이었다 그리고 더군다나 밤이었다. 벚꽃잎이 벚꽃잎이 머얼리서 하늘하늘 떨리었다 떨다가 하필 내 앞에서 멈추었다 그 눈길이 내 앞을 운명처럼 막았다 가슴이 막히어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흐느끼었다, 이대로 ..
다시 숲에서 외 1편 이향아 나무가 산고를 견뎌 새움을 피울 때 땅 밑으로 한 자씩은 키가 자라고 오래된 나무들의 희고 맑은 뿌리는 수상한 세상을 망사처럼 감싼다네 손바닥을 등걸에 가만히 대어 보면 구천에서 천상으로 흘러가는 물소리 어제에서 내일로 다리를 놓는 소리 숲의 나라 나무들의 회담을 아시는가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 답답할 때면 한 그루 나무처럼 숲에 가서 만나세 두 팔 벌려 기다리는 초록지붕 예배당 발치에서 시들고 다시 피는 풀꽃들은 우리들이 돌아서서 뒷모습을 보여도 영 이별은 아니라고 다독거릴 것이네. 빈집 버리기도 쉽지 않다 함께 지낸 세월 쌀 짐도 마땅찮다 낡아버린 몸뚱이 이래저래 나도 함께 빈집이 되었다 살림살이 거덜난 집구석이 되었다 문을 열면 가로막힌 거대한 벽과 벽 비좁다는 것은 믿지..
나에게 말한다 2 일상의 언어, 일상의 생활 새 시집을 발간하려고 교정을 보다가. 같은 어휘가 여러 편의 시에 중복되어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별스럽지도 않은 말을 이렇게 여러 번씩 반복하다니--' 나는 적절한 말을 찾아서 하나하나 수정하면서 짜증이 났다. 나는 지금 어휘의 빈혈증을 앓고 있는가? '문화의 발전'이란 곧 어휘의 수가 증가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낭패감을 느꼈다. 비단 이번뿐이 아니다. 첫번째 시집은 처음이라는 흥분 속에서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얼렁뚱땅 지나갔다. 그런데 두번째 시집에는 '문풍지’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왔다. “이 선생은 ‘문풍지 우는 소리’를 좋아하더군요.” 이렇게 남들이 먼저 발견하고 일러 주었다. 사실은 본인인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야..
꽃차를 마시며 외 7편 이향아 꽃차를 마신다 목숨의 한 가운데 정수리를 따서 연꽃 송이 우리어 향내에 갇힌다 찻집의 커다란 창 유리에는 이른 봄 는개가 낮은 소리 흐느끼고 새로 생긴 가슴 앓이 숨을 한참 고른 후 사기 잔 적막 속에 차를 따른다 이제 나 이렇게 막바지에 왔는가 얼린 꽃 녹여서 향이나 우려 아무렇지 않게 꽃차를 마시다니, 눈 감으면 원도 없지, 무얼 또 바라랴만 나는 또 죄 하나를 쌓고 있는가 혼자서 차를 마실 때 차를 마시며 사람 사이의 일을 생각합니다. 전화만 걸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죽기 전에 만날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혼자 차를 마실 때, 나는 연애하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그윽합니다. 그들처럼 쓸쓸합니다. 나는 이 시간을 좋아합니다...
한 시인의 고백21 나는 시를 몰라요 이향아 ‘문학을 한다’ 이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흔히 ‘문학을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음악을 한다’, ‘미술을 한다’, ‘무용을 한다’는 말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을 업으로 삼든 그렇지 않든, 그것을 전공하든 그렇지 않든, 문학을 가까이 하고 즐긴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문학을 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문학을 한다’고 하면 흔히 창작을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옳지 않다. 남이 쓴 문학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것도 문학적인 능력이다. ‘나는 詩를 몰라요, 詩에는 문외한입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어떤 시 구절을 읽으면서 콧날이 찡해지는 순간을 경험했다면 그는 결코 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시나 소설, 희곡의 어떤 대목을 읽으면..
풀과 나무의 이름 이향아 시의 이론을 강의하다가 나는 느닷없는 질문을 하였다. “여러분, 삐비꽃을 아세요?” 그리고 조금 더 호들갑을 떨면서 “삐비꽃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도 있습니까?”라고 덧붙였다. 예상했던 것처럼 학생들 대부분이 삐비꽃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도시에서 자랐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에게 산야에 피어있는 꽃이나 풀잎에 관심을 쏟을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해 전에도 은하수를 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본 일이 있다. 단순히 통계를 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설마 은하수를 못본 사람이야 없겠지’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물었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판이했다. 학생들 대부분이 은하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은하..
떠돌지 않으리 이향아 부릴 만큼 부리던 몸 가라앉고 싶을 때는 서울역으로 가리 거기서 장항선 열차를 타리 차창에 기대어 눈을 감기 전 네거리 모퉁이 허름한 가게 나는 벌써 문 앞에 도착해 있으리 귀먹은 홀아비의 외동딸 순례 불러서 손잡고 집으로 가리 한약방 간판 걸린 골목 어귀의 가다가 엎드리면 벚나무 그늘 비 개인 나무 아래 버찌를 줍고 이름난 삯바느질 싱거미싱은 온 동네 콧노래에 저절로 돌아 아버지가 매어 둔 튼실한 그네 한꺼번에 수십 년이 흔들릴 거야 나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아 속이 울컥 치오르면 서울역으로 가리 가서 있으리, 떠돌지 않으리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