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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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아 선생님 ]

풀과 나무의 이름

박숙인 2022. 12. 6. 15:12

풀과 나무의 이름

이향아

 

시의 이론을 강의하다가 나는 느닷없는 질문을 하였다.

“여러분, 삐비꽃을 아세요?”

그리고 조금 더 호들갑을 떨면서

“삐비꽃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도 있습니까?”라고 덧붙였다.

예상했던 것처럼 학생들 대부분이 삐비꽃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도시에서 자랐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에게 산야에 피어있는 꽃이나 풀잎에 관심을 쏟을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해 전에도 은하수를 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본 일이 있다.

단순히 통계를 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설마 은하수를 못본 사람이야 없겠지’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물었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판이했다. 학생들 대부분이 은하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은하수를 보았노라고 말한 몇 사람 가운데는 영화에서 보았거나 그림에서 본 사람, 혹은 담배갑에서 본 사람도 끼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나는 그것을 학생들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변호할 구실을 찾았다.

가장 감정이 윤택한 나이, 열일곱 살을 ‘공부’에 밀리고 시달렸다고. 제 체중보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시작종 끝종에 쫓기던 아이들이라고. 그들이 언제 한가하여 은하수를 쳐다나 보았을 것이며 쳐다보고 싶은 마음의 여유가 있었겠는가고. 설령 어쩌다 은하수를 바라보았다 해도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에 휩싸여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이런저런 변명을 해주면서 나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도 마음은 계속 쓸쓸하기만 했다. 쓸쓸한 내 마음과는 달리 학생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은하수를 보았는가 못 보았는가가 그리 대단한 사건인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에 경험했던 똑같은 암담함과 똑같은 쓸쓸함을 나는 삐비꽃을 말하면서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에게 제자들이 시를 왜 공부하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반문하였다.

-- 여러분 왜 시를 공부하지 않겠습니까, 시는 가히 신명을 일으키고 시는 사물의 이치를 알게 합니다. 시는 여럿이 어울릴 수 있게 하고 정직한 감정의 표현으로 원망도 할 수 있게 합니다.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게 하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게 합니다. 그리고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합니다.(子曰 何莫學夫詩 詩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 鳥獸草木之名)--

이 중에서도 특히 ‘풀과 나무와 새와 짐승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고 한 대목은 그 앞의 여러 항목의 내용을 포괄하는 농도 짙은 부분이다.

흥이 나게 한다는 것은(詩可以興) 신명을 일으킨다는 것이며, 신명이 좋다는 것은 정서가 충일하다는 것이다. 보게 한다는 것(可以觀)은 사물을 투시하여 옳게 인식하고 이해하게 한다는 것, 여럿이 어울릴 수 있다(可以群)는 것은 남을 배려할 줄 안다는 것이다. 자신을 양보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배려할 수 없다. 원망하게 한다는 것(可以(怨)은 투명한 감정의 정직한 표출을 말한다.

가깝게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게 한다(邇之事父 遠之事君)는 것은 윤리와 도덕의 기본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찮은 사물의 이름을 안다(多識於 鳥獸草木之名)는 것은 바로 관심과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설명해 준다.

시를 공부하면 삐비꽃만이 아니라, 씀바귀꽃, 미나리아재비꽃도 알 것이다. 시를 공부하면 은하수를 사랑하게 되고 여울과 산과 바다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가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다.

 

콩나물을 다듬으면서 나는

나란히 사는 법을 배웠다

줄이고 좁혀서 같이 사는 법

물 마시고 고개 숙여

맑게 사는 법

 

콩나물을 다듬다가 나는

어우러지는 적막감을 알았다

함께 살기는 쉬워도

함께 죽기는 어려워

우리들의 그림자는

따로따로 서 있음을

 

콩나물을 다듬으면서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쓸데 없는 것들

나는 가져서 부자유함을 깨달았다

 

콩깍지 벗듯 벗어버리고 싶은

물껍데기 뿐,

내 사방에는 물껍데기 뿐이다

 

콩나물을 다듬다가 나는 비로소

죽지를 펴고 멀어져 가는

그리운 나의 뒷모습을 보았다

-졸시 <콩나물을 다듬으면서> 전문-

 

 

이 시를 읽은 한 주부가 농담겸 말했다.

“콩나물을 다듬기로 하면야 제가 선생님보다 열배나 더 많이 다듬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선생님은 이런 시를 쓰고 저는 못 쓴 거예요.”

많이 다듬었다고 쓰는 것은 아니다. 콩나물을 아무리 많이 다듬었어도 콩나물과 시인이 만나지 않으면 시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콩나물을 다듬을 때마다 콩나물을 만나서 이런 생각 속에 잠기게 된다면 얼마나 불편하고 귀찮을 것인가? 시를 쓰기 전에 지쳐버릴 것이다.

시인이 콩나물과 만난다는 말은 시인의 가슴에 불씨가 켜져 있는 상태에서 콩나물과 합일되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시를 공부하면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안다고 하였다.

이름을 안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들에게 쏟는 관심과 사랑의 용적이 특별하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시를 공부함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사실은, 시를 공부하는 바로 그 사람의 이름, 바로 그 사람의 목숨의 이름, 그 사람의 생활과 인생의 이름, 그 가치를 알게 하는 것이다.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생활을 갈망하는 마음은 같은 대열에 나란히 서 있다.

끊임없이 미완성의 것을 완성하려 하는 마음, 추악한 것을 미려한 것으로 수정하려 하며, 지상의 것을 천상의 것으로 끌어올리려고 하는 노력도 시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현재는 아름답지 않을지라도 장차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하는 세상의 모든 마음은 시를 갈망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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