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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시 당선작 - 주소력(住所歷) / 봉주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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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시 당선작 - 주소력(住所歷) / 봉주연

박숙인 2023. 7. 10. 14:44

2023 현대문학 신인추천 시 당선작 _주소력(住所歷) / 봉주연

       심사위원 : 박상수  이혜미

 

 주소력(住所歷)

 

그렇게 나갔다가는 추울 거야.

아침저녁으로 후회하기 위해 봄날이 있는 것 같아.

 

늦은 저녁 놀이터에서 나란히 그네를 탔다. 뭐 이런 데서 놀아. 핀잔을 주면서도 누가 더 높이 올라가나 시합을 벌였다.

 

식탁 아래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해. 호텔 로비에 있는 그랜드피아노 아래에 들어가기도 했다. 벙커 침대를 갖고 싶어. 어디서 그런 말을 알아 온 건지. 나는 갖고 싶은 것을 분명히 말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하는 사람을 보면 스스럽게 느껴져.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 천에서, 유연함 속에서.

 

어른들의 무릎까지 오는 아이들. 아이들의 정강이까지 올라온 계단 한 칸. 펜스가 쳐진 강아지 놀이터를 구경하는 사람들. 벤치를 밟고 오르면 펜스 너머를 넓게 볼 수 있다. 목을 가누는 힘을 기르라고 아이들을 일부러 엎드려 놓기도 한다.

 

조그만 사람에게선 갖은 애를 쓴 냄새가 난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작은 보습학원이 줄지어 있다. 하교 시간에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이 지나가면 햇볕 냄새가 났다.

 

타향이 고향이 되는 거야. 어지럽게 짐이 펼쳐진 거실 마루에 앉았다. 반나절 만에 다른 곳으로 왔구나. 달라지기보다 달라지기를 결심하는 시간이 길고. 본가가 어디냐고 물으면 태어난 곳을 말해야 할지, 자라온 곳을 말해야 할지, 부모님이 계신 곳을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면 장소들이 남는다.

잘 자라다 가요.

 

 

 

녹천

 

 

 

푸른 강이란 뜻인가.

내가 사는 곳에 누군가를 초대했을 때

이곳의 유래를 생각해보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아침이면 집에서 나와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다.

밤에는 역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고

 

표지판이 보일 때마다 마을 이름의 유래를 찾아 봤던 적이 있어. 한동안 지하철을 탈 때 지루하지 않았다. 너는 역과 참 가까운 곳에 사는구나.

 

나의 동네는 사슴 녹鹿 자를 갖고 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내방송에 귀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제기동에서 청량리, 청량리에서 신이문, 월계를 지나는 동안

 

창밖을 보면 반칙이야.

역의 이름을 맞히며 놀이를 하는 연인에게

기관사의 목소리가 유일한 심판관이다.

 

순록은 고작 길들여진 사슴이란 뜻이야.

커다란 뿔을 갖고 있는 사슴이 사람에게 길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해.

 

순록은 툰드라 지방 사람들에게 중요한 동물입니다. 순록 떼는 고기와 가죽, 우유와 이동 수단을 위해 키워졌으나 완전한 가축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순록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다니며 생활한다.

 

길에는 새벽에 내린 눈이 한쪽으로 잘 치워져 있었다.

너는 외우고 있는 길도 앞서 걷지 않는다.

 

오랫동안 내가 푸른 강에 살고 있다 믿었다.

 

⸺⸺⸺⸺⸺

* 서울동물원 동물 정보

 

 

 

덜미

 

 

 

맞은편으로 사람이 오자

우리는 한 줄을 만들었다.

 

강가에 흰 새가 잠들어 있다.

수풀 속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손목시계가 멈춰 있다.

 

올려 묶은 머리

네 윗목에 제비초리를 본다.

 

옛사람들에게 인형극은 덜미였대. 덜미가 잡힌 인형들, 천막 뒤에서 인형을 움직이는 사람에겐 덜미가 전부였다. 관객들은 인형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 뒷목을 본 이는 영원히 천막 뒤에 감춰진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인형극이 끝나고 사람들은 마음을 둥글게 감아 정리하면서 서로에게 오래 감춰온 이야기를 꺼낸다. 그들 사이에 무언가 달라져 있고 더 이상 서로의 앞에선 머리를 고쳐 묶지 않게 된다.

 

고백은 가슴 속이 아니라 뒷목에 담겨 있다.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 사람들은 짧게 탄식했다.

저녁의 정체를 밝혀냈다는 듯.

 

수풀 속에서 계속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소리가 좋고

너는 꼭 벌레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고 무서워한다.

 

맞은편으로 사람이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나란히 걷는다.

 

녹슨 농구대 옆

전광판에는 시간도 표시된다.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가까워졌다.

 

  

 봉주연 / 1995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2023 현대문학 신인추천 시 당선.

 

 

      ―《現代文學 2023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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