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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시랑토앙케 - 정양 시집

박숙인 2023. 1. 30. 19:37
암시랑토앙케
정양 시집

 

 

암시랑토앙케 | 몰개시선 2

정양(지은이) | 몰개 | 2023.01.27

128쪽, 120*190mm, 166g,   ISBN 9791188071562

정가  12,000원

 

몰개시선 2권. 삶의 아픈 굴곡을 격조 높은 서정으로 승화시켜온 정양 시인의 시집. 2016년 구상문학상을 수상한 <헛디디며 헛짚으며> 이후 7년 만에 상재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유년시절의 일화를 생생한 기억의 언어로 재현한다. 그동안 시대와의 불화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면서 현실과의 긴장을 유지해온 시인은, 민화처럼 남아 있는 1970년대의 풍경을 해학의 정신을 담아 품격 있게 그려낸다.

 

 

목차

1부 들마을 민화
겨울밤 / 더 큰 소리로 / 진잡수유? / 짜짜놀이 / 보리타작 / 도둑질 / 다시 만나서 / 짚 한 다발 / 봄잠 설치며 / 단수수 잔치 / 앵속 얻기 / 억새밭 선열이 / 그날 이후 / 연하남들 / 베신 / 비얌괴기 / 뻥쟁이나 허풍쟁이나 / 딱 한 모금 / 가물치 낚시 / 미신과 확신 / 땜쟁이 노래 / 야꼽쟁이 /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 바람쟁이 하나쯤

2부 질 게 뻔해도
봄비 / 질 게 뻔해도 / 그거 안 먹으면 / 단풍 / 가을밤 / 달밤 / 눈 내리는 강가에서 / 다리 주무르기 / 봄밤 / 유리창에 얼핏얼핏 / 매미소리 / 진달래와 철쭉 / 눈 오는 밤 / 밤에 우는 새 / 마지막 잎새 / 무등산에도 무등은 없다 / 백산 백비 / 민망한 꽃들이 / 도보다리 / 남는 시간 / 한몸 되기 그리 쉽던가 / 봄꽃

발문 쓸쓸함의 깊이를 가늠하는 시・김영춘

 

 

추천글 

 

*  정양의 시는 시대와의 불화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면서 현실과의 긴장을 고양하는 한편, 말과 말 사이에서 발생하는 해학의 정신을 품격 있게 유지함으로써 독자에게 격조 높은 서정의 지평선을 제시하고 있다. - 안도현 (시인)

* 건축된 활자가 물렁물렁한 반죽물로 돌아가서 발화 현장의 생생함을 담아낸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계가 놓쳐버린 청각의 우주가 부활한 것이다. 근대 미문주의와 숭문주의를 내면화한 채 잔뜩 긴장하고 있던 독자들은 시각의 위계로부터 놓여나 모처럼 ‘듣는 독자’로서의 해방감을 누리기도 하겠다. - 손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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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정양 (지은이) 

 

1942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와 원광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시 「天井을 보며」가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1977년 윤동주 시에 관한 평론 「동심의 신화」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시집 『까마귀떼』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나그네는 지금도』 『철들 무렵』 『헛디디며 헛짚으며』 등을 펴냈으며 모악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백석문학상, 구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민화적 언어가 빚어내는 웅숭깊은 해학과 서정!”
“영혼의 거울에 비친 사람 냄새 가득한 시편들!”

품격 있는 해학과 격조 높은 서정

삶의 아픈 굴곡을 격조 높은 서정으로 승화시켜온 정양 시인이 신작 시집 『암시랑토앙케』를 펴냈다. 2016년 구상문학상을 수상한 『헛디디며 헛짚으며』 이후 7년 만에 상재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유년시절의 일화를 생생한 기억의 언어로 재현한다. 그동안 시대와의 불화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면서 현실과의 긴장을 유지해온 시인은, 민화(民畵)처럼 남아 있는 1970년대의 풍경을 해학의 정신을 담아 품격 있게 그려낸다.
1942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정양 시인은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 지금까지 오롯이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김용택, 안도현, 유강희, 박성우 등 수많은 문인의 선배이자 스승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반세기 넘게 이어져온 정양 시인의 시세계는 등단작 「천정을 보며」에서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네 사는 일 따뜻하여 / 잠 아니 올 때 / 내 기억 밖에서 흘러가던 바람소리 / 어쩌다 되돌아와서 / 내 영혼의 우수의 석경을 닦는다.”라는 구절에 나타나 있듯이 시인은 “우리네 사는 일”로부터 자기 “영혼”을 맑게 닦아내는 것을 시 쓰기의 중심으로 삼아왔다. 세상의 일을 영혼의 거울에 담아내고, 그 거울에 비친 동시대의 풍경을 문학으로 형상화해온 시인에게 모국어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시인은 모국어가 함의하고 있는 민족적 정서를 눈썰미 있게 읽어냈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세태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심성과 인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짚어냈다. 그처럼 정양 시인에게 시 쓰기는 ‘영혼의 석경’을 닦는 숭고한 행위인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보통사람들
시집 『암시랑토앙케』는 지나간 세월 속에 남겨진 상흔들을 차분하고 단단한 언어로 소개한다. 1부 「들마을 민화」에는 시인이 기억하는 고향 마을 이야기를 소재로 한 시편들이, 2부 「질 게 뻔해도」에는 잊혀져 가는 순간과 사람의 모습을 맑고 투명한 언어로 포착해낸 시편들이 담겨 있다.
1부의 작품들은 “70여 년 전,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제일 가난했던 내 소년시절, 내가 겪은 가난한 들마을 사람들의 얘기들을 민화적(民畵的)으로 투박하게 그려본 것”(「시인의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민화적’이라는 표현 방식이다. 민화는 꾸밈이 없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이다.

      서울효제국민학교에서
      김제공덕국민학교로 전학 왔던
      육이오 한 해 전 3학년 때
      공덕학교 아이들은 모두 맨발로 학교에 다녔다
      내 하늘색 운동화를 아이들은 베신이라 했고
      나를 베신 신은 놈이라 부르기도 했다

      맨발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처음엔 이상하게 여기다가 며칠 뒤부터
      길가 다박솔 밑에 신을 감추고
      나도 맨발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중략…)

      어느 날 그 다박솔 아래 베신이 없어졌다
      훔친 놈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내 손으로 당장 쥑여뻐린다면서
      복철이가 불같이 화를 냈지만
      나는 베신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고
      앓던 이 빠진 것처럼 개운하기만 했다
      ―「베신」 부분

‘서울’과 ‘김제’의 거리만큼 ‘베신’과 ‘맨발’의 차이는 크다. 맨발의 세계에서 베신을 신는 것은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자는 “베신 신은 놈”에서 “맨발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됨으로써 비로소 공동체에 합류한다. “어어 참 마디따 보리마슨 역시 / 이러케 구워 멍는 거시 최고지”(「보리타작」), “이렁 거시 다 크니라고 허는 지싱게 / 괴얀스레 너무 걱정덜 허덜 마러”(「그날 이후」)에서처럼 시인이 민화의 언어를 즐겨 사용하는 것은 지금은 희미해져버린 맨발의 세계를 우리 앞에 다시 불러내기 위함이다. 그 아스라하고 따뜻했던 날들의 기억을.

하수들이 세상에 남긴 인생 노래
정양 시인에게 시는 예술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에 나타난 삶은 예술이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를 넘어선다. 정양 시인은 쓸 수 없는 것은 쓰지 못하는 법이고, 써서는 안 될 것은 쓰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 그에게 시는 꼭 써야만 하는 것들이고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 더는 못 감출 상처”(「단풍」)들이고, “목숨 걸린 걸 알고 저렇게 / 악착같이 맴맴거리”(「매미소리」)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는 우리의 삶이 “남겨야 할 말이 꼭 있다는 듯이 / 마지막 잎새 하나 창 밖에 / 이 악물고 대롱거”(「마지막 잎새」)리는 것들이다. 이처럼 정양 시인은 삶이 시에 앞서고 시가 삶의 잔여가 되기를 바란다. 이는 모든 삶은 결국 죽음에 귀착한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서 비롯된다.

      나는 가끔 티비 프로그램 중
      장기 두는 걸 즐겨 본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고수일수록 질 듯한 판은
      서둘러 포기해버리고 하수일수록
      질 게 뻔해도 끝까지 둔다

      무슨 의로운 일에 목숨 걸어야지 싶어
      늙어 병들어 죽는 걸 부끄럽게 여기던
      고수인 척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거니

      이제 와 돌이켜보면
      질 게 뻔해도 끝까지 두는 게
      세상에 대한 최선의 예의인 것 같다
      최선의 예의일지 마지못한 도리일지
      늙어서 병들어 죽는 걸 이제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질 게 뻔해도 끝까지 두는
      끝까지 시달리는 하수들의 회한이
      장기판마다 새삼 되씹힌다
      ―「질 게 뻔해도」 전문

정양 시인은 “질 게 뻔해도 끝까지” 살아보는, 그래서 어쩌지 못하고 삶에 “끝까지 시달리는” 하수임을 자처한다. 시는 그런 하수들이 세상에 남기는 노래이다. 그렇게 남겨진 시편들에는 하수의 삶이 아니라 ‘시달림’이 새겨져 있다. 때문에 정양 시인의 시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은 어쩌면 무의미하다. 대신 명사로서의 인생이 아닌 동사로서의 시달림을 찾아야 한다. “누굴 그리 보고 싶은지 // 빗방울들 맺혀 그렁거린다”(「봄비」)고 할 때, ‘그렁거’리는 그 미세한 떨림이 바로 시달림의 순간들이다. 그래서일까? 시집 『암시랑토앙케』를 읽고 나면 가벼운 미열에 시달리게 된다. 그 미열에서 헤어나면, 시집을 읽기 전과는 분명 다른, 삶의 새로운 기운을 충천한 것처럼 마음이 맑고 가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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