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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靑色紙 신인상 당선작_어둠(외 4편) / 유주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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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靑色紙 신인상 당선작_어둠(외 4편) / 유주연

박숙인 2023. 8. 9. 17:08

2023 靑色紙 신인상 당선작

어둠 (외 4편)

유주연


저 편에 촛불과 램프 그 아래 놓인 편지
당신은 힘겹게 등을 말아 두터운 헤링본 그레이 블랑켓을 걷고 협탁 앞으로 걸어간다
제임스와 제임스는 자고 있다
창 밖으로 어렴풋이 인기척이 들려 당신은 커튼을 친다 손이 차가워지기 전 봉투를 찢어 편지를 꺼내는 당신
봉투는 아주 얇아서 봉투 뒤로 당신 얼굴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 어느 새인가 멍해지는 당신은 고통을 달리 표현할 줄 몰라 없는 소리로 다만 웅얼거린다
웅얼거림을 멈추고 주먹만을 꼭 쥔다 이제 당신 주변의 어둠이 눈 앞의 빛보다 크게 느껴진다

새와 백자

사위 고요한데
별이 모로 쏟아지는 통창을 둔 흰 공간에서
피아노 한 음 한 음 누르며
대기가 음악에 스며든 흔적
저 유백의 빙렬(氷裂)로부터
떠올린다
하얀 빛에 놓인 하나의 존재를

물의 정령

물의 리듬을 아시나요 각각의 호수와 강과 바다에는 그것이 접촉하는 몸의 고유한 형태들이 있고 그 형태와의 접촉을 우리가 주재한다는 것을

언젠가 그대가 말을 잃고 통영의 해변을 홀로 거닐 때 또 다른 그대가 그대의 그대들과 바위 밑에서 나를 스칠 때 그 물의 성질 또한 우리가 조율했지요

우리의 리듬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을 줄 수는 없지만 외려 그렇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합니다
배회하는 서로 다른 그대에게 적합한 음형과 톤과 물결의 강도와 형상을 선물하려는 우리의 마음씀을 가끔 알아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대들 중 철학자와 시인들은 유독 우리에게 고집스레 다가오려 했지요 우리도 당신들을 궁금해 합니다만 우리는 만나도 만나지 못하는 여운을 더욱 믿습니다

바람을 사이에 두고 장기를 순환하여 늘 스치는 그대와 우리가 실은 같은 햇볕과 달빛 아래 각자의 리듬을 풀어 가는데 그것을 아시나요
언젠가 극소의 빛 아래 당신들이 우리가 되는 날 우리는 나뭇잎을 타고 각각의 구슬로 하강할 것입니다
우리가 나뉘는 그날 그대와 그대와 그대는 우리처럼 퍼져 함께 올라오세요
그날부터 그대들이 우리의 혈관이 된다 하지요
그러니 그대들의 체온을 미워하지 마세요

우리들은 아직 보지 못한 그 뜨거움의 바다를 그리며 우리의 일을 다하니까요
흐르고-또-흐르면서

▲유주연 / 1988년 전주 출생. 서울대학교 졸업 및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연구. 〈2023 靑色紙 신인상〉 당선
▲심사위원: 김대현, 김지윤, 김태형, 신철규, 이은규, 이재훈, 최진석

 

  ―계간 청색종이》 202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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