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인의 시, 그리고

깨꽃을 검색하다 외 4편/ 박정원 본문

[ 박정원 시인 ]

깨꽃을 검색하다 외 4편/ 박정원

박숙인 2022. 11. 28. 18:07

깨꽃을 검색하다 / 박정원

 

 

             

길은,

학교운동장에서 끊겼다

 

얼굴 없는 걸음들이 딴죽을 치는 사이

어린 깨꽃이 짓밟혔다

 

CCTV는 항상 뒤태만 저장해 놓았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마스크도 모자이크처리 되었다

교실 뒤편에 눌어붙은 핏빛 꽃물만 몇 날 며칠,

보여주고 또 보여주었다

 

초가을이었다

조회 수가 제일 많았다

 

그뿐이었다

 

 

 

- <시와정신> 2010.가을호 발표/ 2011 <오늘의 좋은시> 재수록

 

 

------------------------------------------------------------------------------

 

 

* 정보화 시대에 이른 요즈음 사람들은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사이버 공간을 통하여 제공되는 지식과 정보에 많이

의존하여 생활한다. 그런데 이 시는 그 사이버 공간의 하이퍼 리얼리티(Hyper Reality)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거리에 설치해 놓은 CCTV는 어린 깨꽃을 짓밟은 범인의 "뒤태만 저장해놓"고, 제작자에 의해 모니터에 나타

난 "마스크도 모자이크처리 되었다". 그리고 깨꽃의 "핏빛 꽃물"만 계속 보여주며 접속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시선을 모은다. 사건의 진실은 그처럼 생략되고 왜곡된 채 사이버 공간에 저장되어 있다. 조회수가 제일 많았다지만

접속자들이 알고 있는 것은 사건의 일부일 뿐 나머지 부분은 임의대로 상상하며 판단할 것이다.

 (김석환 시인, 명지대 교수)

 

 

 

 

 

  발자국 없는 발자국들

 

 

         

  해진 구두의 밑창을 열고 통기타 줄을 넣었다

  흔들다리를 지나 마천루에 오르기 위하여 늑골 안쪽에 박힌 쓸쓸함을 꺼내기 위하여

 

  너는 꼭 그곳에 있었고

  그곳으로 향하는 반대쪽에서는 훌쩍이는 오동꽃 소리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1번 줄과 6번 줄은 너무 멀어

  악보 없는 엄지와 소지는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가슴팍으로 고개만 들이밀어 

 

  사라졌으나 사라지지 않는 발자국에게 맨 밑바닥의 안부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짓

 

 

  멈춘 발등에 얹힌 이슬이 어느새 흔적 없다

 

 

  다시 구두 밑창을 열고 통기타 줄을 넣는다

 

  진창길이 오동꽃빛으로 혼절하던 그때, 한 소리와 맞서기 위해 핏방울이 흩뿌려지고

  남은 소리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발자국을 공손히 받쳐 든다

 

  마천루에 앉아 통기타를 치는 사람아

  씨 디마이나 지세븐 씨, 4분의 4박자, 루루루 루루루― , 그토록 묻어놨던 발자국들을 그리워할 때

 

  - 『우리詩2011.3월호

 

 

 

 

 

 

 

 결빙

 

 

  그 단단한 그릇에 무엇을 빠뜨렸는지

  당신이

  내 등을 밟고 간다

 

  돌팔매질까지 한다

  얼음덩어리를 끌어안고 나뒹구는 내가 보인다

 

  춥다

  어스름 등불이 켜질수록 냉랭한 불

  그마저 먹어치우는 눈발

  차가운 불기둥 속으로 물고기가 치솟을 때마다

  외로움이라는 거 쓸쓸함이라는 거 장작불처럼 활활 타오르거나 고드름처럼 거꾸로 처박힐 듯

  내 속을 잔뜩 치받는 거

 

 

  극에서 극으로 달린다

  당신이 서 있던 마지막 자리를 당겨보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허울 좋은 사랑이나 증오 따윈 가감 없이 얼어붙어

  돌연, 푸르스름한 얼음호수가 지구의 눈이라고 생각될 때, 눈발이 포장마차의 국숫발처럼 쏟아질 때

 

    - 『우리詩』 2011.3월호

 

 

 

 

   * 사진출처 : 네이버블러그 "지구외톨이"

 

룽다깃발 그늘에서 경쾌한 

 

 

 

밀감을 몇 개월간 책상위에 놔뒀다

바싹 말랐다 거무튀튀한 눈동자 같다

그의 시야로 모슬포 바닷가에 당도한다

갈색 조랑말 서너그룹 입마다 갈기를 물고

통역불가한 외래어로 난상토론 중,

배경화면이 규격화된 밀감박스로 바뀐다

밤 10시 티베트行 KAL機에 실린다

곧바로 드리궁틸 벼랑길을 오른다

룽다깃발 아래에 屍軀를 내려놓자

떼로 몰려드는 독수리들, 死者의 살점이 튀고

하얀 뼈들이 여기저기 나뒹군다

천장사들의 뼈 바수는 소리에 설산마저 어둡다

아직은, 죽음까지는 飛躍이다, 아니다

경계선을 밟을 때까지 현재진행형의 풍장이다

독수리가 내 가슴에다 뼛가루를 게워낸다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던 눈동자까지 토해낸다

한줌 주검을 넘나보는 동안 예사롭지 않은 눈빛들

두려워 마라 벗어날 수 없다면 그냥 즐겨라

선 밖에서 누군가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다

 

- 『시산맥』2011. 봄호

 

 

 

 

바깥에서 서성이다

 

   

이파리는 나무의 입술

입술을 뗄 때마다 바스락거린다

생사를 넘나들며 참회할지니

내 허물을 남김없이 거두어다오

선 바깥으로 나간 法頂을

다시는 부를 수 없다

이파리 한 장 떨어진다

말 많은 입술들이 밟힌다

어떤 소리도 소유하지 않았으므로

낙엽이 쓴 행간을 읽어낼 수 있다

그의 주검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성냥불을 댕겨본다

죽음은 다시 죽을 수 없다

불붙은 낙엽에게 들어볼 뿐이다

 

 

- 『창작21』2010.겨울호

 

'[ 박정원 시인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까운 방 / 박정원  (0) 2022.12.04
박정원 시인의 시  (1) 2022.11.3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