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좋은시 읽기] (220)
박숙인의 시, 그리고
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허 연 용서는 해뜨기 전에 하는 거라지만 이불에서 나오듯 아파트를 나왔다 견인선이 필요하다 강의 싸늘함을 보다가 가슴을 치며 2월에 대해 쓰거나 무개화차가 필요하다 낯선 역사에서 이상한 용기를 내서 격한 포옹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불현듯 애인은 애인이 아닌 것 같다 사랑도 사랑이 아닌 것 같다 뼛속으로 길을 내는 일인 것 같다 청하는 것보다 서로 많이 주었지만 우리는 적다 얼굴이 안 보이고 심장이 느껴지고 단지 시를 낳을 것이다 지난겨울은 멀리서 온 나쁜 소문처럼 아무 확신이 없었고 가엾게도 셀 수 없이 희한한 것들을 만들고 그것들은 언제나 초안이었다 애인은 혼자가 되어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혼자가 될 때 성숙해지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회청색 새들이 수 세기 동안 그래왔..
꽃 (외 4편) 문태준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첫 기억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 돌고 돌고 있었지 나는 세살이나 되었을까 볕 바른 흰 마당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깰 때 들었던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 아마 서너살 무렵이었을 거야 지나는 결에 내가 나를 처음으로 언뜻 본 때는 음색(音色) 시월에는 물드는 잎사귀마다 음색이 있어요 봄과 여름의 물새는 어디로 갔을까요 빛의 이글루인 보름달은 어디로 갔을까요 뒤섞여 있던 초록들은 누구의 헛간으로 갔을까요 나는 갈대의 흰 얼굴 속에 있었어요 마른 잎에서는 나의 눈을 보았어요 얇고 고요한 물, 꺾인 꽃대, 물에 잠기는 석양 ..
구절초 시편 /박기섭 찻물을 올려놓고 가을 소식 듣습니다. 살다보면 웬만큼은 떫은 물이 든다지만 먼 그대 생각에 온통 짓물러 터진 앞섶 못다여민 앞섶에도 한 사나흘 비는 오고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허기를 버리는 강 내 몸은 그 강가 돌밭 잔돌로나 앉습니다 두어 평 꽃밭마저 차마 가꾸지 못해 눈먼 하 세월에 절간하나 지어놓고 구절초 구절초 같은 차 한 잔을 올립니다 -시집
산책자 보고서 신용목 어쩌면 허기진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지붕의 망치질 소리로 비가 온다 지붕을 뚫지 못해 빗방울은 대신하여 빗소리를 집 안으로 내려보낸다 이제는 그만 굴러 떨어지고픈 그림자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비탈의 오래된 집 끓는다는 말 속에는 불꽃의 느낌이 숨어 있다 비 오는 날 지붕이 끓는 것처럼 냄비 바닥의 불꽃 속에 숨어 있는 빗소리의 느낌을 라면 가닥으로 삼킨다는 말 속에는 또 비처럼 흘러내는 몸의 느낌이 있다 나의 몸은 비를 대신하여 집 안에 고여 있다 나는 비의 느낌으로 숨어 있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한사코 지붕에 부딪치는 빗방울을 지운다 바닥에 누운 나는 한사코 바닥에 차는 빗소리를 지운다 빗방울의 시간은 빗소리의 시간보다 더 멀리 있어서 빗소리의 시간은 나의 시간보다 더 멀리 ..
흰꽃 등나무 옆에서 / 황유원 저녁 늦게 파주출판도시에 들렀다가 지지향(紙之鄕)에서 일박하고 새벽에 일어나 흰꽃 등나무를 본다 흰 꽃 이미 다 진 등이 꺼진 등나무 일석 이희승 선생이 1973년 혜화동에 집을 신축하며 오백 원을 주고 사서 심은 두 그루 중 하나라는 등나무 (나머지 한 그루는 또 어디서 흰 꽃을 밝히고 있나?) 2002년 서호정사 옆에 식재했을 때 수령이 삼십 년 높이는 삼 미터 정도를 웃돌았는데 그러니 이십 년이 지나 지금은 수령 오십 년 나보다 딱 열살이 더 많구나 흰 꽃으로 등을 밝힌 지도 벌써 오십 년 매년 등불을 밝히는 마음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워 나는 지난 이십 년간 간혹 이 길을 지나면서도 너를 알아보지 못했다 무려 이십 년 동안 어두웠던 등잔 밑 뒤늦게라도 등잔 옆으로 찾..
어떤 비밀 / 박일환 나무는 햇살 쪽으로 가지를 뻗는다 살기 위해 뻗어 나온 가지를 보기 싫다며 전기톱으로 뭉텅 잘라내던 손을 본 적이 있다 지하 단칸방에서 안전장치 부실한 공사장에서 냉난방기도 없는 물류 창고에서 햇살 쪽으로 내밀던 손이 잘려 나가고 때로는 모가지가 날아가기도 했다 잘려 나간 나뭇가지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구도 행방을 묻지 않고 “잘린 가지는 금방 또 자라요.” 무심한 말을 남기고 떠난 작업자들 중 누군가는 새벽마다 자신의 목을 근심스레 어루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햇살이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는다 햇살이 죄가 없듯 나뭇가지도 죄가 있을 리 없는데 불안이 불안을 낳는 날들이 이어지곤 한다 세상에는 누구나 알아도 모르는 체하는 비밀이 많다 —계간 《청색종이》 2022년 가을호 --------..
유채꽃밭에서는 모두가 황홀하다 (외 1편) 허형만 햇살도 바람도 노랗게 물든 유채꽃밭 한 마지기가 제주에서 도착했다. 유채꽃밭을 시나브로 거니노라면 제주 앞바다 너울성 파도 소리도 노랗게 물들어 있고 그 위를 나는 갈매기 깃털도 노랗게 젖어 있다. 유채꽃밭에 놀러 온 구름 꽃과 꽃 사이 그늘도 노랗다. 유채꽃밭에서는 모두가 황홀하다. 시간의 무늬 참꼬막 껍질에 새겨진 파도의 무늬 그 사이사이 숨겨진 푸른 별 자국 개펄처럼 부드러운 물결 피부 서서히 스며든 투명한 시간 모든 역사는 시간의 무늬다. 한겻의 숲 아침나절, 이 숲 의 나뭇잎들이 온통 별빛이에요. 사람들은 한겻이라 햇발에 반짝인다 생각 할 것이나 아니에요, 그것은 편견 때문이에요. 하늘이 가까울수록 더 빛나는 저 이파리 를 보세요. 거문고자리의 ..
칫솔의 기억력 변윤제 피를 보고 맙니다. 솔이 완전히 뭉개져 있습니다. 이빨을 기억하는 일을 칫솔은 자신의 힘으로 삼고 혀에는 백태의 눈보라 몰아칩니다. 때마침 나가 버리는 화장실 전구. 혀에 스며드는 쇠 맛. 혈관에 흐르던 어둠이 바깥의 어둠과 만날 수 있도록. 칫솔이 잇몸을 그어 버린 것입니다. 화장실 천장엔 줄기처럼 별이 매달리고 온갖 별자리가 달리는데 사수자리에서. 긴 화살의 꼬리가 날아가는데. 칫솔이란 망가지기 위한 기억력입니다. 칫솔을 주기적으로 갈아야 하는 이유는 망가진 칫솔이 우리를 망가뜨리려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솔이 우리를 기억하는 한, 우리의 치아 또한 그것을 기록하려 시도합니다. 뭉개질 결을 따라 벌어지는 치아. 구역질이 변기 물처럼 쏟아지고. 목젖 뒤의 별똥별. 어긋난 치열이. 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