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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민 시인 ]

백성민 시인의 시

박숙인 2022. 11. 30. 12:49

낙타의 여정/ 백성민

 

고삐 쥔 손이 흔들릴 때마다 두려웠다

푸른 초원이

신기루라고 모두 손 사래질 할 때도

목숨 하나씩 담고 건너야 하는 고비사막

난생 처음 등에 맨 혹 하나 떼어

녹슬어 무딘 칼로 열십자 길을 낸다

 

사막의 모래폭풍은 잠시의 길마저 지워버리고

돌아나갈 길마저 잃어버린 이곳은 툰드라의 고원

 

어느 편협한 사상의 절름발이가

이 낯선 곳을 찾아올까만

바람은 태고의 몸짓으로 생명의 씨앗을

실어 나르고

단단한 가시로 잎을 틔운 천형의 그림자만

냉엄한 햇볕 아래 꿋꿋하다

 

전설로만 남은 65센티미터의 거대한 족적은

전설보다 긴 이야기일 뿐,

타클라마의 무덤은 생명을 위해 준비된

마지막 여행지다

 

 

 

워킹 푸어 / 백성민

 

 

그가 눈을 뜬 것은 새벽이 채 잠에서 깨지도 않은 시간이다

그의 자리 한 뼘 너머

행여 곤한 잠 속에서 불러내고 싶지 않은 미지근한 온기가

어둠처럼 웅크리고 있고

숨을 참아가며 방문을 연다

 

방비할 틈조차 없이 밀고 들어오는 싸늘함

쪽마루에 디딘 발끝이 등덜미를 후려치고

움츠려드는 어깻죽지가 진저리를 치다

마주치는 별빛 하나가 푸근하다

 

열고 닫을 문조차 없는 행색뿐인 부엌살림은

알전구 하나에 호사스럽고

어젯밤 남겨두었던 찌개냄비에 물 한 컵과 소금 한 수저 풀어 넣는다

 

으깨진 두부 몇 조각과  신 김치 몇 조각이

기름기 하나 없는 창자 속을 채우는 것도 복이라고

야무지게 다지는 가슴 한구석이 축축하게 젖어 온다

 

수삼일 전부터 고기 한번 먹고 싶다고 투정질 하던 어린 아들놈에게

운수 좋아 품삯이라도 후하면 비린 생선 한토막이라도

사다 먹여야지 하는 생각은

눅눅한 웃음 한편을 물들게 하고

개다리 상을 들어 늪 속 같은 방안으로 밀어 넣는 등덜미가 싸늘하다

 

 

* 워킹 푸어 (working poor )  : 일하는 빈곤층이라는 뜻. 저임금의 육체노동자들,

                                              임시직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처럼 열심히 일해도 저축하기

                                              빠듯할 정도로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계층, 이들은 갑작스런 병이나 실직 등으로

                                              한순간에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뼈 / 백성민


깊은 밤이면 빈 방에 들어와
죽음보다 깊이 눕는 몸 하나
머리맡에 앉아 가만히 그를 내려다본다

절은 땀 냄새와
역겹지 않은 피 냄새가 섞여
어느 울창한 정글 속에서
물고 물렸을 짧지 않은 사투를 본다

시체도 땀을 흘린다

문득 가엾다는 생각에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낚아채는 손길,
딱딱하게 굳은 저 몸 어디서
이리도 날렵한 움직임 남았는지

행여 저 죽은 잠을 자는
저 사내는
칼날 위, 위험한 짐승인지도?

 

 

뫼비우스의 띠 / 백성민


쪽문을 나서는 시간은 정확했다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우주의 항로처럼
문턱을 넘는 순간, 불변의
원심력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왼발의 균형을 잡기도 전

어제는 없던 허방 디딤이 오른 발에 느껴지는 것도 잠시
늙은 구두 수선공에게 삼천 원을 들여 밑창을 기운 작업화는
철길을 건너 낡은 건물의 이발소를 지나며 빙글빙글 도는

원의 중심을 잡으려 심호흡을 한다
우주 정거장에 불이 켜진 것은 그때였다
중세의 계단은 작업화의 비틀거림에 외마디 비명을 질러대고
가픈 숨결이 서둘러 공간이동의 위험을 경고한다
냉기와 어둠만이 존재하는 대기권 밖, 창 하나의 사이로
수족관의 탁한 산소량이 가시고기들의 눈빛들을 체념으로 몰고 가고
돌아서는 등 뒤 어느 별에선가 보낸 발신음이 궤적을 이탈한
움직임을 멎게한다

"좌표2009점 2다시 27,-공오점.45 막부 셋 투하 요망 "
그리고 이어지는 낮은 호명과 산소마스크의 필요성을 외면한 용병들이
대기권 밖을 향해 돌진을 시작한다

 


 

변증법/ 백성민

 

 

짙은 허무의 덤불에서

가장 빛나는 한때를 상기한다.

모든 것이 쓰러지고 모든 것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별이 빛을 내는 이유가 있다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하나의 결정으로 모인 까닭일 거라는

상투적인 변증법이 더는 감동의 시대가 아닌

광속의 질주 앞에서 무엇을 빛이라는 이름으로

 하늘에 걸어둘 것인지

 

초록은 권태의 극이라고 했던 선구적인 천재 시인에게

꽃 한 송이를 바치는 방종함은 범하지 말자

 

대립과 대립의 모순된 구조 앞에 시간은 늘 불변의 법칙으로 존재하고

어느 깊은 산속에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저 가녀린 떨림 앞에

작은 감동의 파장을 불러일으킨다면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구차한 변명이

어둡고 습한 골목길로 이제 막 걸음을 옮긴다

 

하늘 끝에서 작은 미동이 인다.

생성의 비밀을 알 수 없는 바람의 몸짓

가로진 전선줄에 한 마리 새가 앉아 있고

저 새가 어디로 날아갈지 짐작할 수 없는 한낮의 끝

후드득 날개를 터는 저 새와 같이

내 생의 가련한 꽁지도 날개를 턴다.

 

 

먼 곳, 불빛 / 백성민

 

 

스스로 섬이 되고픈 반란을 꿈꾼다는 것은

위험하다

놓아질 수 없는 것들과의 이별에 대한 연습

등 돌리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것은

불온한 사상의 모태일 뿐,

피해갈 파도와 바람은 마주 오지 않는다

 

소리를 가르며 다가오는 어둠의 항로 위

스스로 조난을 꿈꾸는 배 한척이 잔물결에 흔들리고

저 멀리 누군가 빛 한 점을 내걸 때

생명을 등에 진 어둠의 채찍이 걸음을 후려친다

 

굽은 허리와 관절마다 박힌 깊숙한 신음소리는

아직도 더 살아내야 할 모질고도 질긴 삶의 외침이고

내일의 빛 한 점을 빌려오는 빈 손짓에

차가운 달빛이 모로 눕는다

 

 

어둠 속에서/ 성민


한 술을 가슴에 붇는다 .
멋대로 자란 가시 꽃 하나
더는 반겨 맞지 않을 캄캄함 속에서
빛나던 상처를 감춘다

달리고만 싶었던 한 때의 욕망조차
거친 들판에서 맴돌고
가장 긴 아름다움을 숙명처럼 받아야 하는
상처로 얼룩진 단발마의 비명.

노련한 사냥꾼의
과녁을 꿰뚫는 화살처럼
치유 할 수 없는 흔적이
오늘도 바람을 맞는다.

든 것은 소멸의 길을 걷고
너는 잊으리라
아름다웠던 형극의 길조차....

 

 

지주회시(蜘蛛會豕) / 백성민


완벽한 거짓을 믿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한 세계를 왔다 갔다 한다는 소문으로 떠돌았다
오랜 세월 연금술사들의 제련법은 언제나 비밀스럽고
해가 숨는 어느 날이
달과 해가 만나 하늘에 별 하나씩을 탄생시킨다는
전설 같은 전설로 길은 그렇게 이어져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 위
낮선 죽음 하나를 목도하고
신비함에 잠시 눈 감았다 뜬 순간
죽음은 길목마다 풍경처럼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 소리쳤다
거미가 거미줄에 목을 매 죽어있어요!
일상이 되어버린 거리의 풍경들은
건조한 바람들이 쓸고 지나고
조금 더 단단해진 두근거림은 돌아보는 후회를
두지 않았다

그리고 또 오랜 시간이 흐르고
풍장의 화려함들이 정지된 사물을 담고
별을 담고, 온 우주를 담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거미는 흔들리는 세상 그 중심의 절대자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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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민 :  1980년에 < 문학> 동인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1989년에 첫 시집 < 이등변 삼각형> 을 출간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죄를 짓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 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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