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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인의 시, 그리고
정현종의 「방문객」 감상 / 김경복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집 『광휘의 속삭임』 2008년.................................................................................................................................... 운명의 여신이 짓는 인연의 실은 얼마나 덧없는가! 쉽게 올이 풀려 잘려 나간다. ..
연(軟)하게 한영옥 톡- 톡 올 듯 말 듯 감촉이 오곤 한다 상추가 되지 못한 상추 씨앗인 듯 배추가 되지 못한 배추 씨앗인 듯 발아되지 못한 것들 어깨 두드리는 겐가 조금은 섭섭하다는 겐가 나도 아직 싹트지 못한 거라는 게지 서럽게 같이 울어보자는 게지 알려줄 듯 말 듯 연하게.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4년 5월호-----------------------한영옥 /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적극적 마술의 노래』 『처음을 위한 춤』 『안개편지』 『비천한 빠름이여』 『아늑한 얼굴』 『다시 하얗게』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등. 현재 성신여대 명예교수
유수필流水筆 차주일 일생을 인생으로 정리하는 사람으로부터선물로 받은, 낡은 만년필과 잉크 한 병 모국어 만년필을 두고서, 거듭외래어 fountain pen이라 말하는 까닭에명사보다 명사가 품은 뜻을 오래 생각하게 되네.선물이 유산으로 개명되는 경로를 맑은 샘물은 하류에 이르러 탁수로 고이지.근원이 뜻을 찾는 노정이란 것 보여 주기 위해.맑은 도착은 없다는 것 증명하기 위해. 발원과 하류; 무채색으로부터 무채색으로까지,걸어가는 사람을 거슬러 가야만 도착하게 되지.탁본으로 해석하는 음각어陰刻語처럼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음音으로수평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훈訓으로 구별하는사람에겐 신이 모르는 만년 내력이 있지. 사람의 뜻이 삶이란 걸 알아차리면두 다리가 펜촉처럼 제자리에 서게 돼.단색의 흑黑이 다의多義의 ..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외 2편) 고두현 늘 뒤따라오던 길이 나를 앞질러 가기 시작한다.지나온 길은 직선 아니면 곡선주저앉아 목 놓고 눈 감아도이 길 아니면 저 길, 그랬던 길이어느 날부터 여러 갈래 여러 각도로내 앞을 질러간다. 아침엔 꿈틀대는 리본처럼 푸르게저녁엔 칭칭대는 붕대처럼 하얗게들판 지나 사막 지나 두 팔 벌리고골짜기와 암벽 지나 성긴 돌 틈까지 물가에 비친 나뭇가지 따라 흔들리다가바다 바깥 먼 항로를 마구 내달리다가어느 날 낯빛을 바꾸면서 이 길이 맞느냐고남 얘기하듯, 천연덕스레 내 얼굴을 바라보며갈래갈래 절레절레 오래된 습관처럼 뒤따라오던 길이 갑자기앞질러 가기 시작하다 잊은 듯돌아서서 나에게 길을 묻는 낯선 풍경. 튤립 뿌리에선 종소리가 난다 겨울이 지난 뒤에야..
봄밤은 짧고 겨울밤은 길다 김금용 견뎌낼 재간이 없다 바다는 춥고파도는 거칠다 사납고 무서운 바다 앞에선사랑도 사치여서붙잡던 손을 놓는다 곪은 염증은 빨리 긁어내야 한다큰 방이 필요 없다다락방도 기댈 벽은 있어서바람 소리 닫아줘서처방약 명세서는 서랍에 밀어 넣을 수 있다 달린다파도와 부딪치기 위해 달린다파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달린다소리 내어 파도처럼 울어본다 닿지 않는 당신 대신가시를 뽑고 도려낸 염증 위에반창고를 붙이러 불 밑으로 다가앉는다손을 뿌리치지 말 걸 그랬다. ―월간 《현대시》 2024년 2월호--------------------김금용 / 1997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물의 시간이 온다』 『각을 끌어안다』 『핏줄은 따스하다, 아프다』 『넘치는 그늘..
홍범도가 오셨다 이동순 홍범도가 오셨다 눈부신 아침햇살로 오셨다 무지와 맹종 걷어내라고 오셨다 홍범도가 오셨다 실안개 바람 향기로 오셨다 사람을 더욱 사랑하라고 오셨다 홍범도가 오셨다 돌주먹 무쇠주먹으로 오셨다 야만과 맹목 깨어 부수라고 오셨다 홍범도가 오셨다 활과 화살촉으로 오셨다 우둔과 무책임 단번에 쏘아 넘기라고 오셨다 홍범도가 오셨다 밀물과 썰물로 오셨다 자신을 서둘러 변혁하라고 오셨다 —계간 《문학청춘》 2024년 봄호 --------------------- 이동순 /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시집 『개밥풀』 외22권.
새 박성현 새가 날아와 곁에 앉았습니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침이면 떠났습니다 어젯밤에는 새의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부리를 열었는데 당신이 웅크려 있었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당신을 꺼냈습니다 차고 앙상한 팔과 다리가 쑥쑥 뽑혔습니다 당신이 없는 곳에 벼랑만 가팔랐습니다 당신의 팔과 다리를 들고 벼랑에 올랐습니다 몇 년이고 비와 눈과 바람을 짊어졌습니다 매일매일 새가 날아왔습니다 매일매일 웅크린 당신을 뽑아냈습니다 —계간 《상상인》 2024년 봄호 ------------------- 박성현 / 1970년 서울 출생. 2009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시 등단.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손택수의 「나뭇잎 피어날 때 피어나는 빛으로」 감상 / 나민애 나뭇잎 피어날 때 피어나는 빛으로 손택수(1970~)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몇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생을 함께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이라도 찾듯..